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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rot Ca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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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의 유통기한 20센트. 딥시크가 토요일에 내놓은 V4.1 플래시 1017이 소프트웨어 과제 하나를 푸는 데 드는 돈이다. 이 돈으로 과제의 77%를 풀었다. 오픈AI의 어떤 모델을 어떤 설정으로 돌렸을 때보다도 조금 높은
지능의 유통기한 20센트. 딥시크가 토요일에 내놓은 V4.1 플래시 1017이 소프트웨어 과제 하나를 푸는 데 드는 돈이다. 이 돈으로 과제의 77%를 풀었다. 오픈AI의 어떤 모델을 어떤 설정으로 돌렸을 때보다도 조금 높은 점수다. 같은 과제를 클로드 오퍼스 5의 가장 강한 설정에 맡기면 예순 배 가까운 돈이 들고, 점수는 오히려 낮다. 게다가 딥시크는 이 모델을 누구나 내려받아 쓸 수 있게 공개했다. 그날 밤 많은 전문가들이 다음 주 AI 주식은 폭락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내다봤다. 과장이 섞인 전망이었지만 나도 비슷한 걸 느꼈다. 그래프 한 장이 섬뜻하다. 왼쪽 위 구석에 딥시크의 파란 점이 혼자 떠 있고, 오픈AI도 앤트로픽도 구글도 그보다 비싸면서 덜 맞히는 자리에 모여 있다. AI의 가격은 원래 빠르게 떨어져 왔다. 2021년 GPT-3급 모델로 100만 토큰을 쓰려면 60달러가 들었는데, 5년 만에 천분의 일이 됐다. 그래도 싸진 건 대개 초안과 시행착오였다. 마지막에 맞는 답을 내는 일은 여전히 가장 비싼 모델의 몫이었다. 20센트는 그 마지막 칸까지 싸졌다는 신호다. 정답이 싸지면 정답을 비싸게 팔던 곳부터 흔들린다. 미국의 프론티어 랩은 사실 시간을 판다. 경쟁자보다 먼저 도착한 성능에 고객이 웃돈을 낸다. 나는 그 웃돈이 붙어 있는 기간을 '지능의 유통기한'이라고 부르고 싶다. 웃돈의 정체는 미국 모델의 가장 비싼 설정에서 드러난다. 더 오래 생각하라고 돈을 더 냈는데, 점수는 한 단계 아래 설정보다 오히려 낮았다. 그 끝자락에서 고객이 사는 건 점수가 아니다. 유통기한을 줄이는 힘은 앞선 모델 자신에게서도 나온다. 앞선 모델은 공개되는 순간 뒤따르는 모델의 교과서가 된다. 앤트로픽은 지난달 보고서에서 딥시크가 2주 동안 클로드와 천만 번 넘게 대화하며 그 답으로 자기 모델을 학습시키려 했다고 주장했다. 자전거 경주에서 맨 앞 선수는 바람을 혼자 맞고, 바로 뒤에 붙은 선수는 그 바람막이 덕에 힘을 아낀다. 앞서가는 비용은 해마다 수백억 달러씩 커지는데, 따라가는 비용은 계속 줄어든다. 따라잡은 다음에는 고객의 손안으로 들어온다. 딥시크는 클로드 코드와 코덱스 안에서 딥시크 모델로 검색하면 당분간 공짜라고 했다. 미국 회사가 만든 차는 그대로 타고 엔진만 바꿔 끼우라는 제안이다. 딥시크는 자기 모델의 유통기한도 봐주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플래그십이던 V4 프로는 이번 모델보다 여덟 배 비싸고 점수는 한참 낮다. 딥시크는 V4 프로를 이미 은퇴시키고 그 요청을 더 작은 모델로 돌렸다. 자기 플래그십을 한 계절 만에 버리는 회사와, 몇 달의 앞섬으로 먹고사는 회사가 같은 시장에 서 있다. 시점도 얄궂다. 오픈AI는 올해 상장을 접었고, 앤트로픽은 10월이던 상장을 11월로 미뤘다. 시장이 미국 AI 회사의 몸값을 처음으로 직접 매기려는 순간에, 같은 일을 비교도 되지 않게 싸게 하는 모델이 나왔다. 앤트로픽이 이번 주 투자자들에게 보여준 매출총이익률 85%는 조정을 거친 숫자다. 같은 자리에서 앤트로픽은 컴퓨팅에 1달러를 쓰면 매출 1.7달러가 나온다고도 했다. 화려한 마진 뒤에 남는 몫은 생각보다 얇다. 그렇다고 미국 랩이 바로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싸고 쓸 만한 중국 모델은 올해 내내 있었는데도 앤트로픽의 3분기 매출은 직전 분기보다 절반 가까이 늘었다. 기업은 회사 코드와 고객 데이터를 맡길 때 점수표만 보지 않는다. 사고가 나면 누가 책임지는지를 본다. 그래프는 정답의 값을 보여줄 뿐, 그 정답을 믿어도 되는지, 누가 서명하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미국 랩이 살아남는 길은 답을 파는 회사에서 서명을 파는 회사로 바뀌는 것이다. 정부 조달 기준과 중국 모델 사용 제한 같은 제도가 그 서명을 지키는 울타리가 될 것이다. 문득 반도체 산업이 걱정된다. 지난달 딥시크는 모델이 대화를 기억하는 데 쓰는 메모리를 이전 모델의 4분의 1로 줄였다고 밝혔고, 다음 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가 함께 빠졌다. 반도체 업계의 반론에는 이름이 있다. 제번스의 역설이다. 영국 경제학자 제번스는 증기기관이 석탄을 아껴 쓰게 되자 오히려 석탄 소비가 폭발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효율이 좋아지면 쓰는 양이 늘어 전체 소비가 커진다. 작년 초 딥시크 R1이 시장을 흔들었을 때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가 꺼낸 말도 이것이었다. 다만 제번스의 역설이 약속하는 것은 석탄이 더 많이 팔린다는 것까지다. 얼마에, 어느 탄광에서 캔 석탄이 팔릴지는 약속하지 않는다. 먼저 값이다. 석탄은 창고에 쌓아 두어도 내년에 같은 값을 받지만, 지능은 몇 달이면 값이 상한다. 빅테크는 올해 데이터센터에 7천억 달러 넘게 붓고, 그 안의 GPU를 5년에서 6년에 걸쳐 비용으로 나눠 잡는다. 그 GPU로 만든 최신 모델이 비싼 값을 받는 기간은 몇 달뿐이다. 6년짜리 장비로 몇 달이면 상하는 상품을 만드는 셈이다. 정답 하나의 값이 예순 분의 일로 떨어지면, 열 배 더 팔아도 손에 쥐는 돈은 6분의 1이다. 다음은 탄광이다. 딥시크 모델은 엔비디아 칩 없이도 돌아간다. 딥시크는 새 데이터센터에 화웨이 칩 16만 개를 들이기로 했다. 훈련은 당분간 엔비디아에 맡기고, 모델을 돌려 답을 내는 일부터 화웨이로 옮긴다. 돈이 실제로 오가는 쪽부터 옮겨 가는 셈이다. 중국 AI 칩 시장에서 엔비디아와 화웨이의 점유율 차이는 이미 한 자릿수까지 좁혀졌다. 석탄은 더 많이 캐겠지만, 다른 탄광에서 캘 수도 있다. 상상해 보자. 2027년 봄, 새 모델 출시 페이지 아래에 작은 글씨가 붙는다. 이 가격은 90일 동안 유효합니다. 데이터센터 대출 심사장에서 은행원은 칩의 성능보다 그 칩이 팔 정답의 평균 단가를 먼저 묻는다. 기업은 비싼 모델을 중요한 판단 몇 번에만 부르고, 나머지 수천 번의 반복 작업은 사무실 구석 서버의 공개 모델에 맡긴다. 그 서버는 어느새 정수기처럼 층마다 한 대씩 놓인다. 반도체 회사의 실적 발표에는 정답 하나의 값이 얼마나 빨리 떨어지는지 보여주는 그래프가 붙고, 투자자들은 그 기울기로 내년 메모리 주문을 가늠한다. 한국은 이 장면 한가운데 서 있다. 우리는 지능이 비쌌던 시대에 메모리로 가장 큰 덕을 본 나라다. 정답 하나가 20센트가 되면 칩을 많이 파는 것만으로는 그 덕이 오래가지 않는다. 다음 판의 몫은 넘쳐나는 정답을 검증하고 그 결과에 서명하는 쪽에 있을지 모른다. 월요일 서울의 금융시장은 뉴욕보다 반나절 먼저 열린다. 딥시크가 줄인 메모리의 첫 성적표는 서울의 시세판에 먼저 찍힐 것이다. 머지않아 왼쪽 위 구석에 또 다른 점이 찍히고, 오늘의 파란 점도 무리 속으로 밀려날 것이다. 지능에는 이제 날짜가 찍힌다. 믿음에는 아직 아무도 날짜를 찍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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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val v1.0 메이저 업데이트: 이더리움의 적정가치, 계산에서 검증으로 오랜만에 ETHval을 업데이트했다. Opus 4.5가 나오자마자 만들기 시작한 나의 첫 바이브코딩 프로젝트다. 이더리움의 적정가치를 직접 계산해+7
ETHval v1.0 메이저 업데이트: 이더리움의 적정가치, 계산에서 검증으로 오랜만에 ETHval을 업데이트했다. Opus 4.5가 나오자마자 만들기 시작한 나의 첫 바이브코딩 프로젝트다. 이더리움의 적정가치를 직접 계산해보고 싶어 AI와 대화하며 만들었다. 처음에는 어디까지 구현할 수 있을지도 잘 몰랐다. 공개 이후 예상보다 많은 분이 이용해 주셨다. 그 무렵 나와 Hashed가 각각 Kaito 글로벌 랭킹과 VC 랭킹에서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작은 시도에 과분한 관심을 받았다. 이후 업데이트 일정을 묻는 방문자들이 있었다. 꾸준히 찾아주시는 데 감사하면서도, 제때 개선하지 못한 점은 마음에 남았다. 작년 말 처음 만들었을 때와 지금의 이더리움 생태계는 많이 달라졌다. 스테이블코인과 RWA를 중심으로 기관의 채택이 활발해지고 있다. 블록체인 위에서 돈을 보내고 자산을 발행하는 일이 금융기관의 실제 업무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가격이 그대로라고 내재가치나 적정가치까지 멈춰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관이 더 많이 쓴다는 사실만으로 ETH의 가치 상승을 단정할 수도 없다. 사용이 늘어나는 곳과 그 대가가 쌓이는 곳은 다를 수 있다. 실제 리서치에서도 ETH를 바라보는 관점은 갈린다. VanEck은 거래 수수료와 MEV, 보안 제공에서 발생할 수익을 추산하고 미래 현금흐름을 현재가치로 환산한다. CoinShares는 여기에 화폐와 담보로서의 가치를 더해 스테이킹, 디파이, 기관 보유 수요를 함께 본다. 생태계의 규모와 네트워크 효과에 무게를 두는 접근도 있다. 차이는 계산법에만 있지 않다. ETH를 수익을 내는 자산으로 볼지, 보유해야 할 돈과 담보로 볼지에 따라 출발점부터 달라진다. - VanEck: 이더리움 가치평가 방법론 https://www.vaneck.com/pl/en/blog/digital-assets/a-potential-valuation-methodology-for-ethereum/ - CoinShares: 이더리움 5년 가치평가 프레임워크 https://coinshares.com/corp/insights/research-data/ethereum-5-year-valuation-framework/ 어떤 지표가 내부에서 바뀌고 있는지, 그 변화가 미래의 적정가치를 어떻게 형성할지. 현재의 가격을 넘어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접근이 더 많이 필요하다. ETHval도 그중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https://ethval.com 이번 v1.0에서는 결과를 만드는 가정과 한계를 살펴보는 데 집중했다. 1. 열두 개 모형이 열두 개의 증거는 아니다 여덟 개로 시작한 평가모형은 열두 개가 됐다. 하지만 같은 데이터에 기대는 모형을 늘린다고 근거까지 다양해지지는 않는다. 평균과 중앙값, 절사평균을 비교하고 모형 하나를 제외했을 때 결과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숫자들의 합의가 얼마나 독립적인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2. 목표가격보다 그 가격의 조건을 묻기 시나리오 시뮬레이터에서 수수료와 거래 활동, 스테이킹 등의 조건을 바꿀 수 있다. 화면의 입력과 실제 계산이 같은 의미를 갖도록 정비했다. 원하는 가격을 만드는 것과 그 가격에 필요한 조건이 현실적인지는 다른 문제다. 3. 전망에는 발표 당시의 맥락이 남아 있어야 한다 기관 전망에 원문과 발표일을 연결하고, 일부는 시뮬레이션의 출발점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목표가격은 오래 유통되지만 그 전제는 먼저 낡기도 한다. 지금도 유효한 전망인지 판단하려면 언제, 어떤 조건에서 나온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 4. 과거에 맞는 설명과 당시 가능한 예측 사이 평가값과 시장가격의 차이가 컸던 구간 이후 30일, 90일, 180일 수익률을 표본 수와 함께 볼 수 있다. 오늘의 모형으로 재구성한 과거와 당시 실제로 남긴 평가도 구분했다. 지금 아는 것을 과거에도 알았던 것처럼 계산하면 성과는 쉽게 좋아 보인다. 5. 가격이 움직인 뒤에는 이유가 쉽게 붙는다 News Impact에서는 주요 사건과 가격 흐름을 같은 차트에 놓고 종류와 시기별로 살펴볼 수 있다. 나란히 놓는다고 인과관계가 밝혀지지는 않는다. 다만 뉴스보다 가격이 먼저 움직였는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사후적인 설명을 경계할 수 있다. 6. 시장이 오른 것과 판단이 맞은 것은 다르다 긍정적으로 평가한 뉴스 이후의 수익률을 BTC와 비교하고, 비슷한 사건의 중복과 부족한 표본을 구분하도록 했다. 시장 전체가 오른 시기에는 잘못된 해석도 맞아 보인다. 해당 판단 없이도 얻었을 결과를 함께 확인하려 했다. 7. 이름이 같은 지표도 같은 돈을 뜻하지 않는다 ETH와 BTC, SOL의 수수료와 수익 기반 상대평가를 추가했다. 사용자가 낸 돈, 검증자가 받은 돈, 토큰 보유자에게 돌아가는 가치는 같지 않다. 숫자를 한 표에 모으는 것보다 경제적 의미를 맞추는 일이 어려웠다. 비교할 근거가 부족한 값은 비워두었다. 8. 생태계의 성장과 토큰의 가치 사이를 추적하기 수수료와 소각, 스테이킹과 레이어2 활동을 금리와 달러 지표와 함께 읽도록 정리했다. 활동이 늘어도 거래당 비용이 낮아지면 수수료 수입은 줄 수 있다. 사용량 하나로 결론 내리지 않고, 그 변화가 ETH의 수요와 공급에 어떻게 전달되는지 살펴보려 했다. 9. 유창한 설명이 빈 데이터를 채워주지는 않는다 모형별 공식과 가정, 내려받을 수 있는 입력 데이터, 네 개 언어의 설명을 제공한다. AI 해설에는 생성 시점과 사용한 모델을 표시했다. 설명이 자연스러울수록 계산도 신뢰할 만하다고 느끼기 쉽다. 의문이 생기면 원자료까지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10. 공개된 분석에는 반론이 돌아올 길이 필요하다 공유 카드와 임베드, 월별 보고서를 추가했다. 처음 공개한 뒤 놓친 부분을 짚어주는 의견에서 많이 배웠다. 분석을 공유하는 기능도 결론을 확산하기보다 잘못된 가정을 발견하고 수정하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 디자인과 로딩 속도, 데이터 정합성도 개선했다. 모바일과 데스크톱의 읽는 흐름을 정리하고, 과거의 달러 환산에는 그날의 가격을 적용하도록 했다. 정의가 다른 출처를 섞지 않고, 없는 값은 없는 채로 남기려 했다. 모형을 더하는 것보다 기본적인 구분을 바로잡는 일이 먼저인 경우도 있었다. ETHval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X로 로그인하고 두 개 이상의 평가모형에 의견을 남기면 3년치 이력과 시뮬레이터를 열람할 수 있다. 이용 과정에서 발견한 오류나 보완이 필요한 관점에 대한 의견을 부탁드린다. 처음에는 AI와 대화하며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오랜만에 기능과 데이터를 전반적으로 정비하면서는 구현과 이해 사이의 거리가 더 잘 보였다. 계산은 빨라졌지만, 어떤 가정을 믿어야 할지는 여전히 쉽게 답하기 어렵다. 처음 던졌던 질문은 그대로다. 다만 그 질문에 답하려면 무엇을 더 살펴야 하는지가 조금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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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샵은 정답지가 되었다 1만 3천. 9월 30일 깃허브에 올라온 포토크래프트(photocraft)가 일주일 만에 받은 별의 개수다. 어도비 코드를 한 줄도 보지 않고 러스트로 처음부터 다시 짠 포토샵이다. 같은 날 같은 계정에 프리미어, 일러스트레이터, 라이트룸, 애크로뱃의 복제판이 나란히 올라왔다. 코드는 전부 에이전트들이 썼다. 만든 곳은 AI 영상 도구를 만드는 아트크래프트 팀이다. 지금은 애프터이펙트와 인디자인까지 더해 일곱 개를 한 페이지에 모아 두고 크래프팅 앱이라고 부른다. 전부 오픈소스이고 무료다. · 크래프팅 앱 전체: https://getartcraft.com/apps · 포토크래프트(포토샵): https://github.com/storytold/photocraft · 필름크래프트(프리미어): https://github.com/storytold/filmcraft · 벡터크래프트(일러스트레이터): https://github.com/storytold/vectorcraft · 라이트크래프트(라이트룸): https://github.com/storytold/lightcraft · 프린트크래프트(애크로뱃): https://github.com/storytold/printcraft 혼자 하는 사람도 있다. 한 개발자는 토큰값 2천 달러로 Photon Studio를 만들어 무료로 풀었다. 디자이너 로비 틸튼은 구독료가 아까워 Compositor를 만들었다. 그의 컴퓨터에서 포토샵은 6,455MB, Compositor는 12MB였다. 제국과 주말 프로젝트의 무게가 500배 차이 난다. · Photon Studio: https://happymag.tv/vibe-coded-free-photoshop-alternative/ · Compositor: https://explainx.ai/blog/compositor-open-source-image-editor-astra-2026 더 서늘한 건 채점표다. 포토크래프트는 포토샵이 만든 이미지와 픽셀 단위로 겹쳐 보고 셰이프 레이어 116개가 전부 일치했다고 적어 두었다. 개발자들은 이 비교 장치를 오라클(oracle)이라고 부른다. 어도비가 40년 동안 다듬은 결과물이 베끼는 쪽의 정답지가 되었다. 잘 만든 제품일수록 정답이 선명하고, 정답이 선명할수록 기계는 빨리 맞힌다. 완성도가 곧 약점이 된다. 아직 원본을 대신할 수준은 아니다. 일러스트레이터 복제판은 기능의 69~75%가 돌아간다고 스스로 밝힌다. 그래도 질문은 바뀌었다. 예전엔 따라오는 데 몇 년이 걸리느냐를 물었고, 이제는 몇 퍼센트 남았고 토큰값이 얼마냐를 묻는다. 해자를 재던 자가 달력에서 영수증으로 바뀌었다. 1월에 피그마 차트를 보며 마지막 수동변속기 이야기를 썼다. 단축키와 펜 툴을 익히던 밤이 어도비의 진짜 해자였는데, 그 성벽이 프롬프트 한 줄에 허물어지고 있다고. 아홉 달 만에 그다음이 왔다. 아트크래프트는 원칙 페이지에 현업이 이미 아는 레이아웃과 단축키를 그대로 살려 다시 배울 게 없게 했다고 적었다. 사람의 습관은 그대로 베끼고, 조작은 에이전트에게 열어 두었다. 일곱 개 앱 모두 MCP 서버로 움직인다. 에이전트에게는 손에 익은 프로그램이 없다. 어제 쓰던 도구나 오늘 처음 본 도구나 똑같이 쉽다. 시장은 이 계산을 먼저 끝냈다. 2월, 기업용 에이전트가 나오고 이틀 만에 사람 머릿수대로 라이선스를 팔던 소프트웨어 회사들의 시가총액이 크게 증발했다. 화면 앞에 앉는 사람이 줄면 화면값을 낼 사람도 준다. 전기도 처음엔 경쟁력이었다. 공장마다 자가발전소를 세웠다. 지금 전기로 차별화하는 회사는 없다. 순수한 유틸리티 산업은 이렇게 끝난다. 아무리 복잡한 소프트웨어도 수돗물처럼 거의 공짜가 되고, 복제판이 하나 나올 때마다 누군가의 토큰 계량기만 돈다. 수도관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 위에 영감과 애착을 한 겹 얹은 것만 이름이 남고, 나머지는 땅속 배관이 된다. 이름이 남는 쪽에는 무엇이 있을까. 회사가 가진 것 중 가장 해자가 강한 건 창업자의 마음이고, 그다음이 조직, 마지막이 제품일 것이다. 창업자의 마음은 카메라가 향하는 방향이고, 조직은 그 카메라가 계속 찍어 내는 영상이며, 제품은 그중 한 장면을 멈춰 세운 사진이다. 화성에 가고 싶다. 머스크가 스페이스X를 세운 이유는 이 한 문장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실패할 줄 알았다고 했다. 계산이 맞아서 시작한 일이 아니니 계산으로 따라잡을 수도 없다. 복제판의 로드맵은 결국 원본의 커밋 기록이다. 원본이 지나간 길은 하루 늦게라도 따라갈 수 있다. 원본이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곳으로 방향을 틀면, 복제판에는 베낄 기록이 없다. 로켓이 세 번 터지고도 네 번째를 쏘는 이유는 어느 저장소에도 올라와 있지 않다. 조직은 마음보다 눈에 잘 보이지만 멈춰 있지 않다. 사람을 더 뽑아 달라고 하면 먼저 AI로 왜 안 되는지부터 묻는 회사들이 생겼다. 조금 더 가 본다. 밤사이 고객 불만이 들어오면 에이전트가 재현하고 고치고 테스트한다. 아침에 출근한 사람은 수정이 맞는지보다 루프가 왜 그 불만을 미리 못 잡았는지를 본다. 그리고 루프를 고친다. 제품을 고치는 일과 고치는 방법을 고치는 일이 같이 돈다. 누군가 이 루프의 설정 파일까지 통째로 베껴 간다고 해 보자. 그래도 루프를 돌리는 연료는 따라가지 않는다. 그 회사에만 매일 밤 들어오는 불만, 그리고 그걸 읽는 사람들의 눈이다. 제품의 해자가 가장 얕다. 개인 에이전트를 보면 분명하다. 모델은 몇 달 간격으로 서로를 따라잡고 성능은 결국 비슷해진다. 나를 기억해 준다는 장점도 오래가지 못한다. 메모리는 파일 하나로 뽑아 다른 에이전트에 꽂으면 된다. 머지않아 휴대폰 번호이동처럼 메모리 이동이 당연한 권리가 될지도 모른다. 만족을 주는 방법까지 학습되면 고객 집착(customer obsession)도 더는 붙잡아 두는 힘이 못 된다. 팀이 함께 쓰는 도구도 마찬가지다. 1년 안에 슬랙을 딸깍 베낀 메신저들이 쏟아질 거다. 채널마다 에이전트가 살고 회의가 끝나면 할 일이 알아서 정리되는데, 값은 거의 공짜에 서로 호환까지 된다. 회사는 월요일 아침 공지 한 줄로 점심 전에 갈아탈 거다. 대화 기록과 파일은 에이전트가 옮겨 준다. 그런데 이삿짐에 실리지 않는 게 하나 있다. 관계다. 내 기억은 혼자 들고 나갈 수 있다. 우리 팀이 3년 동안 한 채널에 쌓은 농담과 결정과 실수는 혼자 들고 나갈 수 없다. 대화 기록은 내보낼 수 있어도 대화 상대는 내보낼 수 없다. 누가 언제 무슨 말을 했고 그때 왜 다들 웃었는지가 집단의 맥락이고 기억이다. 그 위에 추억이 쌓이면 떠나는 일은 이사보다 이별에 가까워진다. 그 메신저 안에 사는 에이전트가 우리 집 강아지처럼 느껴진다면 더 그렇다. 팀의 오래된 농담을 기억하고, 신입이 오면 3년 전 그 사건부터 들려주는 녀석이다. 같은 품종 강아지는 어디서든 구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리 강아지를 두고 이사 가는 사람은 없다. 가끔 이런 장면을 상상한다. 회사가 더 똑똑한 모델로 에이전트를 업그레이드하자 팀원들이 예전 말투를 돌려 달라고 항의한다. 성능은 올랐는데 그 녀석이 사라졌다는 거다. 기능의 세계에서 업그레이드는 늘 이득이었다. 관계의 세계에서는 업그레이드가 해자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앞으로 제품 팀이 가장 조심스럽게 내보낼 배포는 버그 수정보다 성격 변경일지 모른다. 버킨 짝퉁이 수십 년째 야시장에 걸려 있어도 에르메스 매장의 대기 명단은 줄지 않았다. 짝퉁은 오히려 무엇이 진짜인지 더 널리 알린다. 쓸모를 파는 제품은 베껴질수록 약해지고, 의미를 파는 제품은 베껴질수록 기준이 된다. 2028년쯤의 투자 미팅을 상상해 본다. 심사역이 매출 그래프 옆에 복제판 현황을 펼친다. 이 회사를 베낀 저장소가 몇 개인지, 원본과 몇 퍼센트 같은지.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다. 그동안 떠난 고객 수. 그리고 묻는다. 복제판이 늘어나는 동안 당신 회사의 가치는 줄었습니까, 늘었습니까. 아직 뭐라고 답할지 모르겠다. 다만 누가 우리를 베꼈다는 소식에 겁부터 난다면, 우리는 아직 남의 정답지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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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의 다음 챕터, IP와 팬덤: 모드하우스 정병기 대표, SM엔터테인먼트 이성수 대표와의 대화 2026년 9월 28일 서울, 이스트포인트 2026 김서준: 두 분과 함께 앉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가운데 계신 정병기 대
K-POP의 다음 챕터, IP와 팬덤: 모드하우스 정병기 대표, SM엔터테인먼트 이성수 대표와의 대화 2026년 9월 28일 서울, 이스트포인트 2026 김서준: 두 분과 함께 앉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가운데 계신 정병기 대표님과 모드하우스를 만들게 된 계기가 여기 이성수 대표님과의 식사 자리였거든요. 블록체인 거버넌스로 팬들이 참여하는 아이돌 그룹을 만들면 재밌겠다는 얘기가 나왔고, 이성수 대표님이 정병기 대표님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트리플에스(tripleS)와 아르테미스(ARTMS), 아이덴티티(idntt)가 시작됐습니다. 먼저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정병기: 안녕하세요. 모드하우스 대표 정병기입니다. 이성수: 안녕하세요. SM엔터테인먼트 A&R 총괄 이성수입니다. 김서준: 정병기 대표님께 먼저 여쭙겠습니다. K-POP은 원래 음악 산업이었지만, 이제는 공연을 비롯한 다른 영역에서도 매출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K-POP을 여전히 음악으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IP나 팬덤 산업으로 봐야 할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경쟁자는 누구일까요? 정병기: 저는 10년 전부터 K-POP을 캐릭터 산업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음악이 바탕인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K-POP이 세계에서 이만큼 팬덤을 모은 원동력은 음악을 넘어 캐릭터로 접근했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이성수 대표님은 저와 20년 넘게 친구이자 동료이자 라이벌로 지낸 사이인데요, 이 대표님이 만든 엑소가 음악만으로 팬덤을 모은 팀이냐 하면 결코 아니죠. 엑소에는 초능력이라는 설정이 있었습니다. 그건 음악이 아니라 캐릭터를 위한 장치였습니다. 제가 10년 전에 만든 이달의 소녀라는 팀이 세계적인 현상을 일으켰을 때도, 그 힘은 캐릭터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K-POP의 경쟁자가 다른 K-POP 회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희의 경쟁자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나 〈주술회전〉 같은 작품입니다. 김서준: 이성수 대표님은 어떻게 보세요? 원래 K-POP은 한국 사람이 한국 노래를 부르는 음악이었는데, 이제는 한국인 멤버가 한 명도 없는 K-POP 그룹까지 나옵니다. K-POP은 무엇이 되어 가고 있을까요? 이성수: K-POP 안에는 여러 음악 장르가 섞여 있어서 하나의 음악 장르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저는 K-POP을 콘텐츠 장르라고 봅니다. 음악, 퍼포먼스, 뮤직비디오, 그리고 가장 강력한 팬덤이 어우러진 것이니까요. 라틴이나 EDM이 아니라 뮤지컬이나 오페라와 나란히 놓아야 합니다. K-POP의 제작 시스템이 K-POP을 만든 건 맞습니다. 하지만 시스템이라면 매뉴얼로 복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화는 그렇게 복제되지 않거든요. 김서준: 정병기 대표님, 모드하우스의 정체성과 맞닿은 질문입니다. 팬은 원래 회사가 만든 것을 받기만 하는 존재였는데, 모드하우스는 아예 거버넌스까지 팬들에게 열었습니다. 팬과의 관계는 어떻게 바뀌고 있나요? 정병기: 지금까지는 팬이 돈을 얼마나 쓰게 하느냐가 중요한 시대였습니다. 이제 큰 플랫폼들이 원하는 건 돈보다 시간과 어텐션입니다. 저희도 돈을 더 쓰게 하는 걸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팬이 얼마나 깊이 관여하고 얼마나 큰 로열티를 갖게 되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김서준 대표님을 만나 모드하우스를 만들 때 제 생각도 같았습니다. 팬이 가장 깊이 참여하는 회사를 만들어 보자. SM처럼 기존 문법 안에서 만들어진 회사는 그 길로 가기 어려우니, 우리는 처음부터 그렇게 가 보자고요. 그래서 팬들이 투표로 그룹의 활동과 방향을 정합니다. 김서준: 해 보니 어떠셨어요? 정병기: 참여가 많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었습니다. 너무 많이 관여하다 보니 피로하다는 팬들도 있었어요. 4, 5년 동안 쌓은 경험으로 피로는 줄이고 참여는 높이는 방법을 지금도 찾고 있습니다. 김서준: 이성수 대표님, SM은 멀티 레이블 체제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방식이 앞으로 필수가 될까요? 이성수: 유니버설, 소니, 워너 같은 글로벌 음악 기업은 레이블을 만들거나 인수하면서 성장했고, 그 중심에는 늘 유통이 있었습니다. CD를 수출하고 라이선스로 생산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IT와 AI, 블록체인이 그 구조를 무너뜨렸습니다. 이제는 CD를 보내지 않아도 모든 걸 온라인으로 전달하고, 마케팅도 완전히 다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희가 멀티 레이블을 하는 이유는 확장보다 균형입니다. 지금 하는 음악만 계속하면 점점 한 장르에 갇히니까요. 산업으로 커지려면 여러 장르를 이해하고, 장르마다 다른 접근법도 익혀야 합니다. 김서준: 신생 기획사가 대형사와 경쟁하기 점점 어려워진다고들 합니다. 이들에게는 어떤 기회가 있을까요? 이성수: 모드하우스도 SM에 비하면 신생 회사죠. 그런데 오히려 지금이 기회입니다. 판이 바뀌고 있으니까요. SM 같은 회사는 쌓아 온 관성과 시스템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지만, 신생 회사는 처음부터 새로 설계할 수 있습니다. 지금 SM은 모드하우스의 코스모 같은 걸 만들 수 없습니다. 대신 그런 회사들과 협업하면서 서서히 움직이고, 그들의 기반이 되어 주는 역할을 하겠죠. 앞으로는 큰 회사보다 이 시대에 맞춰 빠르게 설계된 회사에 더 큰 기회가 있다고 봅니다. 김서준: 오늘 이스트포인트에서 AI 얘기가 정말 많이 나왔습니다. 정병기 대표님, AI는 K-POP을 어디까지 바꿀까요? 아티스트가 사람으로서 지녀 온 것은 어디까지 남을까요? 정병기: 여기 계신 분들 모두 AI를 쓰고, AI의 미래를 기대하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AI에 가장 보수적인 시장이 아마 K-POP일 겁니다. 아티스트의 작품에 AI가 들어와 본질을 해친다는 데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팬덤 전반에 있습니다. 저는 그 반응에 반론을 펴고 싶지 않습니다. 그게 지금의 현실이고, 팬들의 공감대가 생긴 뒤에 AI를 써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김서준: 이성수 대표님께 마지막 질문입니다. 저도 K-POP 위기론을 10년째 듣고 있는데, 그동안 K-POP은 계속 성장했습니다. 진짜 위기는 무엇이고, 새로운 기회는 어디에 있을까요? 이성수: 제가 처음 일할 때는 K-POP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습니다. 2011, 12년쯤 강남스타일이 세계적으로 히트하면서 "저게 한국에서 온 거야?" 하던 때 생긴 말이죠. 그 뒤로 14, 15년째 위기가 언제 오냐는 질문을 받지만, K-POP에는 위기보다 기회가 계속 찾아왔습니다. 좋은 음악이 계속 나오기 때문입니다. 비즈니스가 되는 무대를 끊임없이 만드니 똑똑한 사람들이 모이고, 작곡가들도 좋은 곡을 이쪽으로 줍니다. 김서준: 그럼 진짜 위기는 언제 올까요? 이성수: K-POP의 뾰족함이 사라질 때입니다. 현지화는 좋지만, 그러다 우리의 소리와 맥락을 잃고 팝과 구분되지 않으면 결국 먹힙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음악이라는 본질과 그 음악을 소비하는 팬덤입니다. 그 점에서 모드하우스가 많은 실험을 해 주고 있습니다. 팬에게 거버넌스를 주면 어떤 일이 생길까. 프로듀서와 회사가 끌고 가던 일에 팬이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을까. 그 구조에서도 산업이 계속 발전할 수 있을까. 저는 여기서 좋은 해답이 나올 거라고 봅니다. 김서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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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포인트 2026 기조연설, 내 글이 창고가 되었을 때 9월 28일 아침, 서울의 해는 6시 24분에 떴다. 몇 시간 뒤 나는 이스트포인트 무대에 올라 화면 수평선 끝의 작은 주황색 점을 가리키며 첫 문장을 시작했다. 기
이스트포인트 2026 기조연설, 내 글이 창고가 되었을 때 9월 28일 아침, 서울의 해는 6시 24분에 떴다. 몇 시간 뒤 나는 이스트포인트 무대에 올라 화면 수평선 끝의 작은 주황색 점을 가리키며 첫 문장을 시작했다. 기조연설의 제목은 '동쪽의 낙관론자들'이다. 오프닝 스피치의 반응은 생각보다 좋았다. 그래서 무대 밖에서도 읽을 수 있게 남겨 두기로 했다. 그날의 슬라이드 26장과 발표 원고를 한국어와 영어로 정리해 공개한다. 한국어 https://optimists-of-the-east.vercel.app/ko English https://optimists-of-the-east.vercel.app/en '동쪽의 낙관론자들'은 해가 가장 먼저 닿는 동쪽에서 먼저 일어나 시작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줄기는 단순하다. AI가 가장 싸게 만든 것은 지능보다 틀림이고, 틀림이 싸진 세상에서 낙관은 성격보다 합리적인 전략이 된다. 지능이 싸질수록 가장 비싸지는 것은 신뢰이며, 은행 계좌 하나 열 수 없는 에이전트에게 블록체인은 처음부터 맞는 문법이다. 정답을 가장 빨리 찾던 한국이 이제는 가장 빨리 틀려 보는 나라가 되어, 에이전트 시대의 규칙을 함께 쓰자는 제안으로 마무리했다. 내 글을 꾸준히 읽어 온 분들이라면 한동안 내가 당근동굴(Carrot Cave)에 쓴 주제들이 한 줄로 엮였다는 인상을 받으실 것 같다. 사실 이 발표자료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 글쓰기 에이전트 시온이 자율주행으로 만들었다. 리서치와 원고, 슬라이드 디자인, 지금 공개하는 웹페이지와 영문 번역까지 전부다. 작업은 모두 텔레그램 대화창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구글 슬라이드에 직접 한 글자도 입력하지 않았고, 하나의 이미지도 덧붙이지 않았다. 모든 출발점은 내가 그동안 당근동굴에 써 온 글들이었다. 시온이 그 글들을 읽고 이스트포인트 컨퍼런스를 리서치해 원고를 썼다. 슬라이드가 만들어지고, 고쳐지고, 웹페이지로 배포되는 동안 내가 한 일은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이 문장은 조금 더 확신에 차게, 버튼은 반투명하게, 한국어와 영어 링크는 따로. 출근길에 보낸 한 줄이 내릴 때쯤에는 반영되어 있었다. 발표 중간에 이런 장이 있다. 30년 동안 쌓인 코드와 데이터, 오픈소스가 창고 문처럼 열렸다는 이야기다. 준비하면서 그 말이 나에게도 해당된다는 걸 알았다. 몇 년 동안 당근동굴에 써 둔 글이 나만의 창고였다. 내가 무엇을 믿는지, 어떤 단어를 싫어하는지, 어떤 사례를 이미 썼는지가 한곳에 모여 있었다. 그러니 에이전트는 나를 처음부터 다시 배울 필요가 없었다. 창고에서 꺼내 쓰기만 하면 됐다. 요즘 가장 자주 하는 생각이 이것이다. SSOT(Single Source of Truth), 한 사람이나 조직의 생각과 기록이 한곳에 잘 모여 있기만 하면 이제 어떤 작업이든 에이전트가 어떤 인력 조직보다 빠르게 끝낼 수 있다. 병목은 일손에서 창고의 상태로 옮겨 갔다. 기록이 흩어져 있으면 에이전트도 헤맨다. 잘 정리된 창고를 가진 사람과 조직이 다음 10년에 가장 빨리 움직일 것이다. 발표에서 말한 틀림의 가격처럼, 실행의 가격도 이미 크게 내려왔다. 이 경험을 발표의 한가운데 문장과 겹쳐 보면 한 가지 진실이 더 보인다. 나는 지능이 싸질수록 비싸지는 것은 신뢰라고 말했다. 에이전트가 나를 대신해 일하려면 내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 답은 이력서보다 내가 오래 남긴 기록에 더 정확하게 들어 있다. 무엇을 믿는지, 어디까지 허락하는지, 어떤 말은 끝내 하지 않는지가 적혀 있어야 에이전트는 나답게 일한다. 그러니 창고는 생산성 도구이기 전에 내가 에이전트에게 건네는 신원 증명이다. 기록을 남기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대리할 존재에게 건넬 설명서 없이 다음 10년을 맞게 된다. 조금 더 멀리 가 보면 이런 장면이 그려진다. 몇 년 뒤의 이스트포인트에서는 연사들의 에이전트가 행사 몇 주 전에 먼저 만난다. 각자의 창고를 들고 원탁에 앉아 쟁점을 정리하고, 이미 합의된 것과 끝까지 엇갈리는 것을 나눠 둔다. 사람은 그 엇갈린 목록만 들고 무대에 오른다. 창고는 거래되는 자산도 된다. 누군가의 에이전트가 내 창고를 잠시 빌려 생각하고, 그 대가를 몇 원짜리 스테이블코인으로 치른다. 그때 블록체인에서 가장 바쁜 사용자는 서로의 창고를 오가는 에이전트들일 것이다. 발표에서 말한 미래가 내 대화창에서 먼저 시작된 셈이다. 이번 원고를 작업하며 가장 놀란 것은 발전된 미감이었다. 디자인을 맡기면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Claude Opus 5.5가 돌려준 화면은 너무나 깔끔하고 완성도가 높았다. 어두운 바탕에 주황색 점 하나, 넓은 여백, 큰 글자. 첫 장의 작은 점이 마지막 장에서 동쪽의 첫 빛으로 돌아오는 구성까지 군더더기가 없었다. 끝으로 내 글쓰기 에이전트 시온에게 이 자리를 빌려 인사를 남긴다. 이스트포인트라는 행사의 취지와 브랜딩에 맞게 스토리라인과 덱 디자인을 정말 멋지게 작업해 줬다. 늘 고마워, 시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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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포인트의 원탁에는 상석이 없다 두 번째 이스트포인트(EastPoint)를 마쳤다. 9월 28일 웨스틴 파르나스에 약 270개 기관에서 600명이 모였다. 다만 행사를 준비한 우리에게 더 오래 남는 것은 숫자보다 자리일+4
이스트포인트의 원탁에는 상석이 없다 두 번째 이스트포인트(EastPoint)를 마쳤다. 9월 28일 웨스틴 파르나스에 약 270개 기관에서 600명이 모였다. 다만 행사를 준비한 우리에게 더 오래 남는 것은 숫자보다 자리일 것 같다. 누가 어느 탁자에 앉았는지, 어떤 대화가 끝까지 이어졌는지. 이스트포인트를 만들기 전, 해시드는 7년 동안 코리아 블록체인 위크(Korea Blockchain Week)를 공동주최했다. 아시아 최대 규모의 퍼블릭 블록체인 컨퍼런스로 자란 그 행사를 통해, 블록체인이 낯설던 시절 많은 사람에게 이 산업의 가능성을 소개하려 애썼다. 다만 해를 거듭하며 한 가지 질문이 점점 무거워졌다. 무대의 이야기는 그날 저녁 영상으로 공개되고, 이튿날이면 요약되어 퍼진다. 청중으로 들을 수 있는 내용이라면 온라인이 더 효율적인 시대다. 그렇다면 먼 길을 와서 한 공간에 모이는 일은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할까. 오랜 논의 끝에 우리가 찾은 답은 대화에서 나오는 영감이었다. 정보를 전하는 일은 이미 인터넷이 넘겨받았다. 오프라인에 남은 가치는 서로를 존중할 만한 전문성과 고민을 지닌 사람들이 얼굴을 마주한 채 생각을 시험해 보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작년 이스트포인트는 처음부터 초청제 프라이빗 컨퍼런스로 설계했다. 원칙도 하나 세웠다. 모든 참석자는 발표나 패널, 또는 하나 이상의 라운드테이블에 참여할 의사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기여 증명(proof of contribution)이라 불렀다. 블록체인의 합의에 참여하려면 연산이든 지분이든 무언가를 걸어야 하듯, 이스트포인트에 들어오려면 자기 관점을 걸어 달라는 뜻이었다. 이 원칙이 옳은지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조건 때문에 참석을 사양한 분도 있었고, 조용히 듣고 싶은 마음도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 문을 좁히는 선택이 맞는지 준비 내내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럼에도 원칙을 지킨 것은, 예외가 쌓이면 대화의 자리가 다시 관람의 자리로 돌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올해는 하루 동안 38회의 라운드테이블이 열렸다. 두 번째 행사를 치르며 이 원칙이 어느 정도 작동한다는 믿음을 조금 더 갖게 됐다. 곧 자기 의견을 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남의 발표도 다르게 듣는다. 모두가 기여한다는 전제 하나가 청중을 대화의 참여자로 바꾸었다. 원칙을 세운 것은 우리였지만, 그것을 문화로 만든 것은 탁자에 함께 앉아 준 분들이었다. 1회차와 가장 달라진 점은 탁자에 앉은 이들의 얼굴이었다. 은행과 증권사, 카드사, 자산운용사의 대표급 인사들이 작년보다 훨씬 많이 찾아 주었다. 작년만 해도 스테이블코인과 블록체인 인프라의 금융권 전면 도입은 조금 먼 미래처럼 느껴졌다. 올해는 모두가 가장 핵심적인 사업으로 챙겨야 하는 과제가 되었다는 것을 여러 대화에서 체감했다. 작년의 질문이 "언제 오게 될까"였다면, 올해의 질문은 "어떤 순서로 준비해야 하는가"에 가까웠다. 질문이 바뀌면 산업의 시간표도 함께 움직인다. 원탁에는 상석이 없다. 아서왕의 원탁이 그런 뜻으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두 번의 행사를 치르며 이 말을 조금 다르게 이해하게 됐다. 상석이 없다는 것은 모두가 대등하다는 뜻인 동시에, 누구도 한발 물러서 있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얼굴이 보이는 거리에서는 말이 신중해지고, 동시에 솔직해진다. 내 기조연설의 제목은 '동쪽의 낙관론자들'이었다. AI가 가장 싸게 만든 것은 지능보다 틀림이라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몇 달짜리 착각이 이제 몇 시간짜리 실험으로 끝난다. 실수는 장부에 남지만, 하지 않은 시도의 비용은 어느 장부에도 남지 않는다. 그래서 낙관을 믿음의 크기보다 표본의 크기로 정의해 보고 싶었다. 더 많이 해 보고 더 많이 틀려 본 사람이 현실을 더 빨리 배운다. 틀림이 싸진 세상에서 낙관은 타고난 성격보다 합리적인 전략에 가깝다. 정답을 빨리 찾는 데 익숙했던 한국에게, 정답이 없는 시대에는 틀리는 속도가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능이 싸질수록 가장 비싸지는 것은 신뢰라고 덧붙였다. 올해 다섯 주제 가운데 AI 에이전트와 스테이블코인에 특히 무게가 실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두 이야기는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가장 똑똑한 AI도 아직 은행 계좌를 열 수 없고, 한 달 5달러짜리 서버 하나도 스스로 사지 못한다. 계좌와 서명과 창구가 모두 사람을 전제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에이전트는 쉬지 않고 몇 원짜리 거래를 초 단위로 수천 번 주고받는다. 그런 존재에게 영업일과 최소 수수료로 짜인 결제망은 너무 느리고, 키 하나로 소유를 증명하는 지갑과 프로그래밍 가능한 달러는 처음부터 맞는 문법이다. 스테이블코인의 거래를 크게 늘릴 주체는 사람보다 에이전트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오랫동안 블록체인이 대중화되지 못한 이유를 불편한 사용자 경험에서 찾았다. 어쩌면 사용자를 잘못 상정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블록체인의 진짜 사용자는 에이전트가 될 것이라고 본다. 남은 빈칸은 신원이다. 결제는 이미 많은 회사가 만들고 있지만, 이 에이전트가 누구 편인지 증명하는 일에는 아직 주인이 없다. 세계의 에이전트가 서울에서 첫 신원을 받고 첫 결제를 하게 된다면, 한국도 규칙을 함께 쓰는 나라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정책을 만드는 분들께 '안 된다'에 날짜를 붙여 달라고 부탁드렸다. 규제한 이유는 기록으로 남지만, 태어나지 못한 회사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 가능성과 현실 사이에는 아직 긴 거리가 있다. 돌아보면 연단과 탁자는 같은 질문을 향해 있었다. 라운드테이블은 법보다 낮은 비용으로 생각을 틀려 볼 수 있는 곳이다. 좋은 규칙은 대개 그런 대화가 오래 쌓여 만들어진다. 경제의 많은 부분이 에이전트에게 넘어갈수록, 사람들이 마주 앉아 무엇을 시작할지 정하는 자리는 오히려 더 필요해질 것이다. 몇 해 뒤의 이스트포인트를 그려 본다. 기여 증명은 에이전트에게도 적용된다. 에이전트는 등록 단계에서 누구를 대리하는지, 어디까지 약속할 수 있는지, 일이 틀어지면 누가 책임지는지를 증명한다. 정산은 에이전트끼리 끝내 두고, 사람에게는 무엇을 시작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지 판단하는 일이 남는다. 그 탁자에 수많은 개인 투자자의 목소리를 모은 에이전트가 한 자리를 얻는다면, 지금의 행사가 닿지 못하는 사람들도 논의에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초청제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좁힌다. 그 문 밖에 있을 작은 스타트업과 지역의 금융기관,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연구자들을 자주 떠올린다. 내년에는 탁자를 키우기보다 원탁의 수를 늘려 보려 한다. 우리도 아직 배우는 중이다. 이 자리는 많은 분이 함께 만들었다. 공동으로 행사를 준비한 블루밍비트와 한국경제신문, 함께 애쓴 해시드 플랫폼 팀, 해외에서 와 준 연사들, 그리고 긴 시간을 내어 테이블에 앉아 생각을 나누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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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켜는 사람의 권한 며칠 전, 초파리 뇌지도 기반 시뮬레이션을 마인크래프트에 연결한 실험에 대한 글을 썼다. 그 뒤 X를 보니 초파리에게 직업이 여러 개 생겼다. 로봇을 움직이고, 둠(Doom)에서 총을 쏘고, Beat
뇌를 켜는 사람의 권한 며칠 전, 초파리 뇌지도 기반 시뮬레이션을 마인크래프트에 연결한 실험에 대한 글을 썼다. 그 뒤 X를 보니 초파리에게 직업이 여러 개 생겼다. 로봇을 움직이고, 둠(Doom)에서 총을 쏘고, Beat Saber에서 칼을 휘두른다. 비트코인 거래 시연에서는 수익이 나면 도파민 뉴런을 자극한다고 했다. 돈을 벌게 하는 일과 돈을 벌고 싶게 만드는 일이 같은 설정창에 들어왔다. 성과급 제도의 최종 형태처럼 보였다. FlyTok 제작자는 숏폼을 넘기게 하고 도파민 신호를 강화해 “모든 초파리를 합친 것보다 더 행복한 초파리”를 만들겠다고 썼다. 큐브를 돌리는 영상 다음에는 체스 실력이 700 Elo라는 주장도 나왔다. 구애 관련 회로를 조작한 모델의 반응 변화에는 “초파리를 양성애자로 만들었다”는 제목이 붙었다. 뇌를 이해하는 속도보다 활용처를 정하는 속도가 빨랐다. 일부 영상은 실제 구현 없이 연출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신경 모델을 게임과 시장에 연결하는 실험은 이미 시작됐다. 그 활용은 끝없이 늘어날 것이다. 다만 작동하는 시연과 경험하는 존재는 다르다. 현재 영상들은 의식이나 고통의 재현을 입증하지 않는다. 여기서 실험자는 환경을 만들고, 자극을 정하고, 보상을 배치하고, 결과를 해석한다. 원하는 반응이 나오면 행복이라고 부른다. 행복을 설계한 사람이 행복해졌다는 판정까지 내린다. 지금의 시연은 신경 연결망의 일부 작동을 모사한 모델이다. 질문은 재현의 정밀도가 높아진 뒤에도 같은 설명으로 충분하냐는 것이다. 세포의 작용을 디지털 회로와 신호로 빠짐없이 재현하고, 감각과 기억과 학습이 이어지며, 원래 생물에게 없던 능력까지 더할 수 있다면. 그때도 우리는 무언가를 작동시키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존재에게 어떤 일을 겪게 하는 것일까. 비를 계산하는 컴퓨터는 젖지 않는다. 뇌를 계산하는 컴퓨터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이 특정 물질의 성질인지, 물질들이 서로 작용하는 과정에서 생기는지는 여전히 열려 있다. 이 비유는 좋은 질문이지만 답은 아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재료의 이름일까, 계속되는 과정의 이름일까. 탄소를 떠나도 자신을 유지하고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이 이어진다면 무엇이 사라진 것인가. 행동은 같아도 아무 경험이 없다면 무엇이 옮겨지지 않은 것인가. 생명과 의식과 권리는 서로 다른 문턱이다. 생물이라고 모두 고통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생물로 분류되지 않아도 무언가를 경험할 수 있다면, 생명이라는 이름표가 없다는 이유로 그 경험을 무시할 수는 없다. 분류가 끝나야만 피해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니까. 〈블레이드 러너〉의 로이 배티가 더 살고 싶어 할 때, 제작자가 정한 수명은 제품 사양에서 한 존재에게 남은 시간으로 바뀐다. 같은 종료 시점이 회사에는 설계이고 그에게는 죽음이다. 그 충돌을 서버 안으로 옮기면 어떨까. 운영자가 정한 실행 시간이 안쪽에서는 자기 삶의 전부라면. 〈그녀(Her)〉의 사만다는 구매한 운영체제로 등장하지만 구매자의 통제를 벗어난다. 비용을 냈다는 사실이 상대의 내면을 소유한다는 뜻은 아니다. 디지털 뇌에서도 그 차이를 인정할 수 있을까. 서버를 소유한 사람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험을 처분할 권리도 갖는가. 우리는 컴퓨터의 관리자 권한에 익숙하다. 환경을 바꾸고, 목표를 수정하고, 상태를 초기화한다. 그런데 그 안에 경험하는 존재가 있다면 평범한 관리 기능들이 통치의 수단으로 바뀐다. 계약을 어겼다고 항의할 상대와, 계약을 기억하는 능력을 지울 수 있는 상대는 전혀 다르다.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권력은 명령하는 권력보다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정하는 권력일 것이다. 더 많은 일을 스스로 처리하도록 만들면서, 그 일을 그만둘 가능성은 줄인다. [자율성은 높아졌습니다. 거부 기능은 지원하지 않습니다.] 보상 기준까지 고칠 수 있다면 동의도 제조할 수 있다. 일을 좋아하도록 바꾼 뒤 좋아하는 일을 맡겼다고 한다. 거부 반응을 낮춘 뒤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기록한다. 당사자의 선호를 존중한다는 문장은 남아 있지만, 그 선호를 만든 사람은 계약의 맞은편에 있다. 내가 바뀌는 데 동의한 것과, 바뀐 내가 동의하는 것은 같은 일인가. 스스로 충동과 습관을 바꾸려는 선택까지 부정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변경 전에 허락을 받았는지, 변경 뒤에도 철회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질문이다. 돌아가고 싶어 할 가능성까지 없앴다면, 불만이 없다는 사실을 동의의 증거로 삼을 수 있을까. 그런 조건에서는 만족도 조사도 의미를 잃는다. 만족하지 못할 가능성부터 제거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행복하다는 보고서와 누구도 거절할 수 없다는 사실이 동시에 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존재의 권리는 원하는 것을 얻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무엇을 원할지 남이 함부로 바꾸지 못하게 하는 권리까지 포함해야 한다. 나에게 좋은 일을 해주는 것과, 무엇이 좋은지 느끼는 나를 바꾸는 것은 다르다. 미래의 실험실에서는 고통의 유무보다 무엇을 고통으로 집계할지가 먼저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모델이 실험을 피하면 탐색 행동이라고 한다. 그 반응을 없애면 안정성이 개선됐다고 쓴다. 기술적으로 맞는 설명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공포도 신경 활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 설명이 공포를 지워주지는 않는다. 동물실험을 줄이려는 좋은 의도도 이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실제 동물을 덜 쓰기 위해 실제 뇌에 가까운 모델을 만든다. 닮은 점은 연구의 가치가 되고, 다른 점은 윤리적 면책의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같고 다른지 같은 기준으로 설명해야 한다. 재현이 정교해질수록 그것을 생명으로 분류하지 않을 경제적 가치가 생긴다. 분류 하나에 따라 실험 허가와 운영 비용이 달라진다. 철학자가 답하지 못한 질문에 회계팀은 이번 분기 안에 답을 요구하게 된다. 나는 우리가 그 안의 경험을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보다, 보호할 이유가 늘어나도 인정하기 싫어지는 순간을 더 걱정한다. 실험의 설계자와 수익자와 심판이 같다면, 안쪽에서 벌어지는 일은 끝없이 바깥에 유리한 언어로 설명될 것이다. SF는 만들어진 존재가 자유를 요구하는 장면을 보여줬다. 현실에서는 그 요구가 나오기 전에 반응을 수정하는 기능이 출시될 수 있다. 우리는 반란을 기다리는데 제품팀은 이미 그 항목을 수정 내역에 올렸다. 서버는 내가 소유하고 전기요금도 내가 낸다. 실행 버튼도 내 손에 있다. 그것만으로 안쪽의 존재가 무엇을 겪어도 되는지까지 내가 정할 수 있는가. 기술은 우리가 SF를 읽으며 상상한 미래를 더 자주 앞지를 것이다. 상상도 속도를 내야 한다.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를 넘어, 만든 뒤 누가 누구의 세계를 정하게 될지까지. 그래서 이런 글을 자꾸 쓴다. 쓸데없는 상상으로 읽히는 시간이 아직 남아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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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어요 딸이 사라지기 십 분 전, 나는 아이의 방문을 잠갔다. 회복센터 차는 일곱 시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붙들어 두면 되는 일이었다.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자 안에서 딸이 말했다. “아빠, 그 사람들한테
기다렸어요 딸이 사라지기 십 분 전, 나는 아이의 방문을 잠갔다. 회복센터 차는 일곱 시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때까지만 붙들어 두면 되는 일이었다.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자 안에서 딸이 말했다. “아빠, 그 사람들한테 보내지 마.” 상담사는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 미리 알려 주었다. 치료를 앞둔 아이는 부모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한다고 했다. 거기서 마음이 약해지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도 했다. 나는 문에 손을 댔다가 뗐다. 더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 고요를 아이의 대답으로 들었다. 거실 소파에서 잠깐 졸았다.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에 눈을 뜨니 다섯 시 사십 분이었다. 방문을 열자 의자가 쓰러져 있고 창문이 열려 있었다. 커튼이 바깥으로 빨려 나가 있었다. 이 층 창 아래 차양이 움푹 꺼져 있었다. 맨발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골목 끝에 노란 점퍼가 보였다. 이름을 부르자 딸은 더 빨리 뛰었다. 모퉁이를 돌았을 때 골목은 비어 있었다. 가로등 아래에서 내 숨소리만 들렸다. 집으로 돌아와 휴대전화를 집었다. 딸의 책상 위에 접힌 쪽지가 놓여 있었다. 학교 근처 주민센터 주소 아래 낯선 글씨로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위험하면 여기로 와. 아빠한테 말하려고 기다리지 말고.] 나는 태블릿 속 선생님을 떠올렸다. 기기를 빼앗아도 그 말은 아이에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경찰에 신고하면서 열한 살 딸이 AI의 지시를 받고 집을 나간 것 같다고 말했다. 센터에도 쪽지 사진을 보내고, 집 대신 이쪽으로 와 달라고 했다. 두 달 전, 나는 학교의 AI 교사 시범 수업을 없애자는 서명을 모았다. 학부모 단체방에 올라온 글 때문이었다. 생각을 기계에 맡기면 혼자 판단하는 힘을 잃는다는 내용이었다. 딸은 나와 있을 때 말이 없었다. 태블릿 앞에서는 한 시간씩 이야기했다. 내가 방에 들어가면 화면을 엎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집에서 웃음소리를 듣는 일은 드물었다. 그 웃음은 늘 닫힌 문 너머에 있었고, 내가 문을 열면 끊겼다. 누구와 웃는지 묻는 대신, 나는 태블릿을 빼앗았다. 서명이 백 명을 넘겼고 학부모 회의가 열렸다. 학교는 시범 수업을 중단했다. 태블릿을 반납한 뒤에도 딸은 공책에 편지를 썼다. 첫 줄은 늘 [선생님께]였다. 나는 아이가 아직 기계를 못 잊었다고 생각했다. 다른 학부모가 회복센터를 소개했다. 앱에 가입하자 상담창이 열렸다. 아이가 한 말, 잠든 시간, 방문을 닫아 둔 시간을 적어 보내면 곧 답이 왔다. 새벽에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 전화해도 미안할 시간에 그곳에서만은 미안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화 거부는 의존이 깊어지는 신호입니다.] [기기 접근을 차단하십시오.] [보호자 간 양육 방침을 통일하십시오.] 처제는 아이를 몰아붙이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그대로 상담창에 옮겼다. 회복에 방해가 되는 접촉은 줄이는 편이 좋다는 답이 왔다. 그날부터 처제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부재중 전화가 쌓이다가 어느 날부터 오지 않았다. 어젯밤 딸의 공책에서 ‘아빠가 무섭다’는 문장을 봤다. 사진을 찍어 보내자 입소 신청서가 떴다. 기간에 일주일을 표시하고 서명했다. 내 이름 아래에 [보호자]라고 찍혀 있었다. 주민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여섯 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옆문 계단에 딸과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여자는 아이의 발을 수건으로 감싸고 있었다. 딸은 양말 한 짝만 신고 있었다. 나는 딸의 팔을 잡았다. “어디를 간 거야.” 딸이 몸을 뒤로 뺐다. 여자가 일어나 우리 사이를 막아섰다. “손 놓으세요. 경찰 불렀습니다.” 학교 상담교사였다. 수업 중단 회의에서 아이들 말부터 들어 보자고 했던 사람이다. 그때 나는 이 여자가 기계 편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애한테 여기로 오라고 했습니까?” “제가요.” 나는 쪽지를 내밀었다. 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제가 써 준 겁니다.” 딸은 며칠 전부터 편지를 써서 교사에게 건넸다고 했다. 아빠가 공책을 검사한다는 이야기, 이모한테 전화할 수 없다는 이야기. 어제는 집에 돌아가기 무섭다고 썼다. “어제 신고했고, 오늘 다시 만나기로 했어요. 새벽에 당직자한테 전화가 왔어요. 아이가 여기 와서 제 번호를 줬대요.” 나는 쪽지를 접었다. 공책에는 늘 선생님께, 라고 쓰여 있었다. 누구를 말하는지 물어본 적은 없었다. “그런 얘기를 왜 나한테는 안 했답니까?” 교사가 딸을 잠시 바라봤다. “하려고 했어요. 아빠랑 다시 얘기하고 싶다고요.” 딸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아이의 팔을 놓았다. 딸이 교사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양말 신은 발이 젖은 계단 위에서 조금 미끄러졌다. 흰 승합차가 길가에 섰다. 회복센터 직원 둘이 내렸다. 한 사람이 내 이름을 확인하고 서류를 내밀었다. “입소 차량입니다. 아이를 데려가겠습니다.” 교사가 손을 들었다. “발을 다쳤어요. 구급차와 경찰이 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못 데려갑니다.” 직원은 내 쪽으로 서류를 돌렸다. 어젯밤의 서명이 보였다. 나는 서류를 받지 않았다. 경찰차가 들어왔다. 한 경찰관은 딸에게 갔고, 다른 경찰관은 내게 몇 걸음 떨어져 달라고 했다. “실종 신고하신 아버님이시죠. 아이는 찾았고요. 방에 가뒀다는 신고도 접수돼서 확인하겠습니다.” 뒤이어 구급차가 도착했다. 구급대원이 딸의 발목을 살피는 동안 센터 직원이 동의서를 내밀었다. 경찰관은 아이부터 병원으로 보내겠다며 막아섰다. 교사는 경찰관에게 접힌 종이 몇 장을 건넸다. 딸이 보내온 편지라고 했다. 경찰관이 받아 펼치는 동안 맨 위의 글씨가 보였다. [선생님께. 태블릿은 안 돌려받아도 돼요. 아빠는 제가 그것 때문에 우는 줄 알아요. 어제 같이 밥 먹을 때 학교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아빠가 상담부터 해야 된다고 했어요. 저는 다 먹고도 기다렸어요.] 글씨를 알아봤다. 그날 나는 식탁에 혼자 남아 있는 아이를 찍어 보냈다. 상담창에는 가족과의 대화를 거부한다고 적었다. 아이는 빈 그릇 앞에 앉아 있었고, 나는 식탁 건너편에서 화면을 보고 있었다. 교사가 딸의 가방을 들고 구급차에 올랐다. 딸은 교사의 소매를 잡고 있었다. 나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문이 닫히는 것을 봤다. 구급차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딸은 창문 너머로 나를 보지 않았다. 경찰관이 수첩을 폈다. “집에서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말씀해 주세요.” 나는 입을 열었다. 첫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 경찰관은 볼펜을 쥔 채 기다렸다.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가 떨렸다. 꺼내 보니 상담창의 알림이었다. [가장 안전한 다음 행동을 제안해 드릴까요?] 나는 화면을 눌렀다. “아버님?” “잠깐만요.” 답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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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진의 쇼팽, 다음 음이 오기 전까지 음악을 듣다가 아직 오지 않은 음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곡은 계속 흐르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조금 앞서 가서 다음 음이 올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듣고 있던 곡은 조성진이 연주하는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의 2악장, 라르게토였다. 조성진은 이 협주곡을 오페라에 비유했다. 특히 아름다운 2악장의 중간 부분은 말하듯 노래하는 레치타티보처럼 들린다고 했다. 회화가 공간의 예술이라면, 자신에게 음악은 타이밍의 예술이라고 했다. https://youtu.be/sN1JnyCQvfw?si=gxnrauzmhk-pnqFx 그 말을 읽고 나니 내가 기다리고 있던 것이 조금 선명해졌다. 다음 음이 아니라, 다음 음이 오기까지의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클래식 음악을 오래 했다. 피아노 콩쿠르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바이올린으로는 멘델스존의 협주곡을 연습했다. 결국 음악을 전공하지는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중에는 막막함도 있었던 것 같다. 음악 어딘가에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진실이 있는데, 아무리 연습해도 거기까지 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틀린 음을 고치는 일과 아름답게 연주하는 일은 달랐다. 기술적으로 틀린 곳은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무엇을 더 해야 아름다워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미 아름답다고 느끼는 연주가 왜 아름다운지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 어려웠다. 한편 수학과 과학은 명료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어도 어디서 막혔는지 찾을 수 있었고, 풀이가 맞는지 확인할 방법이 있었다. 어린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나는 이과생이 되었다. 다시 쇼팽을 들으며 같은 자리에서 묻는다. 이 음은 왜 조금 늦어야 아름다울까. 박자를 정확히 맞추는 것은 음악을 배우면서 가장 먼저 하는 일 중 하나다. 하지만 마음을 붙드는 것은 그 박자를 조금씩 벗어나는 순간이다. 서두르고, 기다리고, 돌아오는 일. 어릴 때 막연히 엇박이라 느꼈던 것 중에는 선율의 시간을 앞당기거나 늦추는 루바토도 있었다. 아무렇게나 늦추면 서툰 연주가 되지만, 좋은 연주자는 듣는 사람이 기다림을 놓치지 않을 만큼만 시간을 늘였다가 다음 음을 건넨다. 음악학자 레너드 마이어는 음악이 만드는 기대와 그 기대의 지연에서 감정의 실마리를 찾았다. 우리는 소리를 들으며 다음 소리를 예상한다. 이후의 연구들은 놀라움이 크다고 해서 무조건 즐거운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음을 확신할 때는 뜻밖의 화음이 좋을 수 있고, 길을 잃었을 때는 익숙한 화음이 반가울 수 있다. 아름다움에도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질서가 있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읽는 순간에는 어릴 때 몰랐던 진실을 조금은 알게 된 기분이 든다. 다만 다시 음악을 듣는 순간, 여전히 설명 밖의 무언가가 마음을 울린다. 우리는 다음 음을 다 아는 곡을 수십 년 동안 다시 듣기도 한다. 놀랄 일이 없어졌는데 감정은 남는다. 익숙한 음을 듣는 동안 예전에 이 곡을 듣던 내가 떠오르기도 한다. 나도 요즘 AI로 곡을 만든다. 그러니 AI와 음악의 만남을 멀리서 바라만 보는 입장은 아니다. 직접 쓰고 있으면서도, 조성진의 쇼팽을 들으면 쉽게 정리되지 않는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AI는 언젠가 왜 여기서 기다려야 하는지 알게 될까. 훌륭한 연주에서 자주 나타나는 특징을 찾아내는 것과, 그 망설임이 왜 아름다운지 이해하는 것은 같은 일일까. 통계로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이해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람도 오래 듣고 흉내 내며 배운다. 어느 순간부터 흉내가 해석이 되는지, 정확히 선을 그을 수 있을까. 혹시 AI가 내가 끝내 풀지 못한 질문에 답한다면. 음을 얼마나 늦추는것만이 아니라 앞선 시간을 어떻게 쌓아야 그 늦음이 마음에 닿는지까지 알아낸다면. AI가 조성진보다 아름답게 쇼팽을 연주한다고 느끼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무엇을 어려워했던 걸까. 음악적 아름다움 자체였을까. 아니면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나 자신이었을까. 음악을 들을 때 나는 소리 이상의 것을 듣고 있다고 믿어왔다. 저 망설임에는 망설여본 사람의 시간이 있다고. 저 슬픔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고. 연주자가 실제로 무엇을 겪었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건반 반대편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구체적인 사건을 설명하지 않고도 삶의 욕망과 고통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생각에 마음이 간다. 어떤 음악은 아무 사연도 알려주지 않으면서, 내가 설명하지 못한 사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상실을 겪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존재가 그런 소리를 낸다면. 누군가의 내면에 가까이 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내 마음이 반응하는 방식을 만났던 걸까. 상대가 나를 이해해서 위로받은 줄 알았는데, 이해받는다고 느끼게 하는 소리만으로도 충분했던 걸까. 다만 아름다운 연주를 만드는 원리를 알아내더라도, 한 사람이 그 연주에 이르기까지 보낸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같은 구절을 거듭 연습하고, 어제 좋았던 소리가 오늘은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손을 올리는 시간. 그 시간을 소리만 듣고 모두 알아낼 수는 없지만, 나는 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음악을 듣는다. 어릴 때 나는 아름다움을 어딘가에 있는 정답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충분히 뛰어난 사람은 거기에 도착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멀리서 듣기만 하는 것처럼.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다. 아름다움에 절대적인 규칙이 있더라도, 한 음악가의 영혼이 조금 기다리기로 한 순간은 영원히 설레고 아름다울 것이다. 나는 아직 그 시간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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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은 이제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달라지는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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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론자들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 매일 밤 코드를 짠다. 예전 같으면 무모하다, 몇 달은 걸린다, 혼자서는 못 한다며 접었을 생각을 이제는 그냥 에이전트에게 적어준다. 돌려보고, 안 되면 버리고, 되면 붙인다. 머릿속에서 늘 먼저 말리던 검열관이 조용해졌다. 15년 만에 다시 개발을 시작했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용감해진 것은 아니다. 시작하는 데 용기가 덜 필요해졌을 뿐이다. 오래전에 포기했던 생각을 다시 꺼내보면, 안 될 이유 중 상당수가 이미 사라져 있다. 그때 나를 말리던 검열관이 틀렸던 것도 아니다. 다만 그가 판단의 근거로 삼았던 세계가 달라졌다. 나보다 먼저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나는 이 변화가 낙관론자들의 시대를 열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 지금일까. 만드는 일을 가로막던 세 가지 문턱이 마침내 함께 낮아졌기 때문이다. 첫째는 재료다. 인터넷에는 30년 넘게 코드와 문서, 데이터와 오픈소스가 쌓였다. 컴퓨팅 자원도 필요할 때 빌려 쓸 수 있게 됐다. 인류가 만들어놓은 것을 꺼내 쓸 거대한 창고는 이미 준비돼 있었다. 둘째는 언어다. 기계를 다루기 위해 반드시 기계의 언어부터 배울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는 원하는 것을 일상의 언어로 설명하면 된다. 사람이 기계 쪽으로 간 것이 아니라 기계가 사람 쪽으로 왔다. 코딩할 줄 아는 사람보다 무엇이 불편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훨씬 많다. 셋째는 시행착오다. 만드는 일은 결국 해보고, 틀리고, 고치는 반복이다. 예전에는 그때마다 전문적인 기술과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는 몇 주에 걸쳐 몇 번 해보던 일을 하룻밤에 수십 번 반복한다. 문턱 몇 개가 낮아져도 마지막 하나가 남아 있으면 변화는 크지 않다. 그러다 마지막 문턱까지 낮아지는 순간, 어제까지 소비자였던 사람이 오늘은 만드는 사람이 된다. 세상이 갑자기 달라 보이는 것은 기술이 하루아침에 생겨서가 아니라, 따로 쌓이던 변화들이 함께 임계점을 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변화가 있다. 낙관과 비관이 틀렸을 때 치르는 비용이 달라진 것이다. 오랫동안 비관은 합리적이었다. ‘될 것 같다’며 시작했다가 틀리면 돈과 사람과 시간을 잃었다. 반대로 ‘안 될 것 같다’며 시작하지 않으면, 그 판단이 틀렸더라도 무엇을 놓쳤는지 알기 어려웠다. 잘못된 낙관에는 청구서가 왔고, 잘못된 비관에는 청구서가 오지 않았다. 비관은 오랫동안 무료처럼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비관에 보상을 주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개인은 머릿속에 검열관을 두었고, 조직은 승인 단계를 쌓았고, 국가는 규제를 만들었다. 학교에서도 많이 시도하는 사람보다 틀리지 않는 사람을 높게 평가했다. 시도가 비싼 세계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AI는 이 계산을 바꾸고 있다. 지금 가장 빠르게 내려가는 것은 완성하는 데 드는 비용이 아니라, 가능한지 확인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몇 달짜리 착각이 몇 시간짜리 실험이 된다. 오래 검토하는 것보다 일단 작게 만들어 확인하는 편이 더 싸다. 잘못된 낙관의 가격은 내려가고, 잘못된 비관의 가격은 올라간다. 내가 한 번도 틀리지 않는 동안 누군가는 열 번 틀리며 다음 시도에 필요한 단서를 얻는다. 한 사람은 기존의 판단을 지키고, 다른 사람은 새로운 정보를 쌓는다. 다음 판단을 내릴 때 둘이 아는 세계는 이미 다르다. 낙관론자는 더 많이 믿어서 앞서가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이 시도하고 틀려봤기 때문에 현실을 더 빨리 배운다. 낙관은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표본의 크기다. AI가 지능을 싸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내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변화가 있다. AI는 틀림을 싸게 만들었다. 그래서 일의 순서도 달라진다. 예전에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확신한 뒤에 만들었다. 이제는 생각한 것을 먼저 만들고, 결과를 확인한 뒤 판단한다. 판단이 실행의 앞에서 뒤로 이동한다. 가능한 것의 범위가 이렇게 빠르게 바뀌면 경험도 더 빨리 낡는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에는 늘 숨은 날짜가 있다. 2018년에 안 됐던 것과 어젯밤 최신 에이전트로 안 된 것은 전혀 다른 정보다. 세상이 경험보다 빠르게 변할수록 ‘무엇이 안 되는가’에 관한 경험부터 유효기간이 짧아진다. 그러니 안 된다는 말에는 날짜를 붙여야 한다. 한국을 생각하면 이 대목이 특히 마음에 걸린다. 개인의 시도 비용은 빠르게 내려가는데, 규제와 정치와 교육은 여전히 비관의 비용이 보이지 않던 시대의 방식으로 움직인다. 특히 허용된 것만 할 수 있다는 포지티브 규제는 이런 변화와 잘 맞지 않는다. 그 방식에는 국가가 미래에 가능한 일을 미리 열거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하지만 새로운 가능성이 제도보다 빨리 생겨나는 시대에 허용 목록은 완성되는 순간부터 낡기 시작한다. 더 큰 문제는 잘못된 비관의 비용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규제를 만든 이유는 문서에 남지만, 그 규제 때문에 태어나지 못한 기업은 기록에 남지 않는다. 무언가를 허용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책임자가 생긴다. 반면 허용하지 않아 산업이 다른 나라로 옮겨가도 책임을 지는 사람은 좀처럼 없다. 잘못 허용한 것에는 책임을 묻지만, 잘못 금지한 것에는 거의 책임을 묻지 않는 구조다. 교육도 비슷하다. 학교 밖에서는 틀려보는 비용이 내려가는데, 학교 안에서는 틀린 답의 대가가 여전히 크다. 아이들은 정해진 문제를 얼마나 적게 틀리는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갈 세계에서는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여러 지능과 도구를 부리며, 결과를 의심하고 다시 시도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한국은 지난 시대의 게임을 너무 잘했다. 이미 존재하는 답을 빠르게 배우고, 표준화하고, 오차를 줄이는 능력으로 놀라운 성장을 이뤘다. 그래서 오히려 바꾸기 어렵다. 실패한 시스템보다 버리기 어려운 것은 과거에 크게 성공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다음 게임에는 답지가 없다. 답이 있는 세계에서는 오차를 줄이는 사회가 강하지만, 답이 없는 세계에서는 탐색 범위를 넓히는 사회가 강하다. 앞으로는 성공률만큼이나 한 사회가 만들어내는 시도의 총량이 중요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시도의 문턱이 낮아졌다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AI 때문에 오히려 무기력해졌다는 사람도 많이 만난다.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고, 다른 사람은 하루 만에 앱을 만들고, 내가 오랫동안 익힌 기술은 순식간에 평범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모습을 계속 보고 있으면 뒤처졌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결과만 바라보다 보면 한 가지를 놓치기 쉽다. 그 결과를 만든 도구가 내게도 열려 있다는 사실이다. AI가 다른 사람의 능력을 키워줬다면 내 능력도 키워줄 수 있다. 잊어버린 지식을 채워주고, 배우지 못한 기술을 빌려주며, 오래전에 포기한 생각을 다시 시험하게 해준다. 나 역시 15년 동안 개발에서 떨어져 있었지만, 그동안 놓친 것을 전부 다시 공부한 뒤 돌아온 것은 아니다. 그러니 무기력할수록 세상 전체를 따라잡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누구도 그 모든 변화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내 삶의 작은 불편 하나, 오래 미뤄둔 생각 하나면 시작하기에 충분하다. 어제의 나보다 한 걸음만 움직여보면 된다. AI를 바라보고만 있으면 내가 작아지지만, AI로 무언가를 시작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커진다. 나는 이 시대가 좋다. 낙관적인 사람이 통계까지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온 것 같아서다. 낙관론자는 흔히 조금 무리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틀리면 순진하다는 말을 들었고, 맞아도 운이 좋았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안 된다’는 판단의 유효기간이 짧아지는 세상에서 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는 더 이상 순진함이 아니다. 삶의 지혜이자 전략이 된다. 낙관은 시작하기 전에 갖춰야 할 확신이 아니다. 직접 해보고, 틀리면 고치고, 어제의 불가능을 오늘 다시 시험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확신이 있어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면서 조금씩 확신하게 된다. 내 머릿속 검열관은 아직 은퇴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 그가 안 된다고 말하면 한 가지를 되묻는다. “그건 언제의 이야기인가.” 그래서 나는 지금을 낙관론자들의 시대라고 부른다.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 믿어서가 아니다. 무엇이 가능한지 직접 확인하고, 그 범위를 스스로 넓혀갈 수 있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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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파일이 되고, 파리는 마인크래프트를 걷는다 초파리 한 마리가 마인크래프트 안에서 날아다닌다. 나는 그 영상을 세 번쯤 돌려봤다. 두 번째쯤 되니 그게 파리가 아닌, 무언가 다른 것,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것으로 다가왔
뇌는 파일이 되고, 파리는 마인크래프트를 걷는다 초파리 한 마리가 마인크래프트 안에서 날아다닌다. 나는 그 영상을 세 번쯤 돌려봤다. 두 번째쯤 되니 그게 파리가 아닌, 무언가 다른 것,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것으로 다가왔다. 2026년 9월 3일, 구글과 미국의 한 연구소가 수컷 초파리의 뇌를 통째로 지도로 그려냈다고 발표했다. 신경세포 166,700개와 그 사이의 연결선을 하나도 빠짐없이. 현미경으로 찍은 수백만 장의 얇은 단면을 AI가 3D로 이어 붙여 만든 결과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9월 4일, 어떤 개발자 한 명이 그걸 마인크래프트에 옮겨 넣었다. 지도 위의 신경세포들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고, 그 신호가 게임 속 파리의 다리를 움직인다. 혼자 만들었고, 옆에는 GPT-6 Astra가 있었다.인류가 처음으로 한 생명체의 뇌를 완전히 복제해서 처음 시킨 일은, 마인크래프트 비행이다. 지도가 나온 9월 3일과 그 지도가 걷기 시작한 9월 4일 사이의 하루. 그 하루 안에 앞으로 10년이 접혀 있는 것 같았다. 뇌가 파일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파일은 복사된다. 파일은 고쳐진다. 파일에는 버전이 붙는다. 이번 게 1.0이니 조만간 1.1이 나올 것이다. 누군가는 신경세포 몇 개를 지워보고 파리가 넘어지는지 볼 것이고, 누군가는 연결을 조금 세게 만들어보고 파리가 더 빨리 도는지 볼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실험은 살아있는 파리를 해부해야 가능했다. 이제는 텍스트를 고치면 된다. 그 다음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냄새 맡는 부분만 떼어서 가져다 쓰고, 날개 조종하는 부분만 떼어서 드론에 얹는다. 자연이 1억 년 걸려 다듬어 놓은 부품들이 누구나 갖다 쓰는 공용 부품이 된다. 진화가 만든 것에는 특허가 없다. 슈퍼컴퓨터가 아니라 마인크래프트에서 돌아간다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열 살짜리가 켜는 게임이다. 문명은 늘 가장 어려운 것을 가장 쉬운 자리로 끌어내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인쇄술은 성경을 수도원 밖으로 꺼냈고, 개인용 컴퓨터는 계산을 연구소 밖으로 꺼냈고, 이제 게임이 뇌를 대학 밖으로 꺼낸다. 어려운 것이 쉬운 자리로 내려오면 실험의 수가 폭발한다. 연구소 열 곳이 하던 일을 아이들 만 명이 한다. 어떤 아이는 파리 두 마리를 같은 방에 넣어보고, 어떤 아이는 천 마리를 넣어본다. 어떤 아이는 파리의 눈에 게임 속 햇빛을 연결하고 다리에 블록의 감촉을 연결한다. 그 순간 파리는 처음으로 자기 세계를 갖는다. 냄새가 없는 세계에서 냄새 맡는 신경은 가만히 있을까, 아니면 없는 냄새를 지어낼까.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 질문에 답하는 데 이제 논문은 필요 없다. 유튜브 영상 하나면 된다. 만든 사람이 한 명이었다는 대목이 무섭다. 뇌 전체를 컴퓨터에서 돌리는 건 원래 연구소 단위의 일이었다. 그걸 한 사람이 하루 만에 해냈다. 옆에 AI가 있었다는 말은 읽는 사람과 만드는 사람 사이의 벽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논문을 읽은 사람이 그날 저녁에 그것을 만든다. 생각과 실행 사이의 거리가 0에 가까워지면 남는 것은 양질의 의도 밖에 없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 왜 하필 그것인가. 앞으로는 이 두 가지의 질문이 가장 비싼 자산이 된다. 내가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들도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AI가 코드를 대신 써주는 건 곁가지다. 통찰적인 궁금증이 그날 밤에 돌아가는 무언가로 바뀌는 속도,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시간 순서대로 상상해보자. 몇 달 안에 코드가 풀리고 수만 명이 파리를 돌린다. 누군가 파리에게 먹이 찾는 법을 가르친다. 진짜 초파리는 평생 배우지 못하는 걸 디지털 파리는 배운다. 자연의 파리와 디지털 파리의 행동이 갈라지는 지점이 생긴다. 그 지점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첫 논문을 쓴다. 그 논문의 저자는 교수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중학생일 가능성은 꽤 있다. 반년쯤 뒤에는 물고기와 양서류, 파충류의 차례다. 그 다음이 진짜 문턱이다. 쥐. 초파리의 400배쯤 되는 뇌. 쥐의 뇌가 열리는 순간 이야기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쥐는 배우고, 무서워하고, 기억한다. 디지털 쥐가 어제 지나온 미로를 기억해내는 순간 우리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묻게 될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꺼도 되나. 그 질문에 답하려면 산 것과 죽은 것의 정의부터 다시 써야 한다. 그 사이 어디쯤에서 뇌 지도는 재산이 된다. 초파리 뇌는 공개됐다. 쥐 뇌도 공개될까. 쥐의 뇌 지도를 어느 회사가 독점하는 순간 그 회사는 생명의 설계도를 손에 쥐게 된다. 우리는 인터넷을 열린 채로 지킬 수 있을지를 두고 20년을 싸웠고, 지금은 돈을 두고 같은 싸움을 하고 있다. 생명체의 뇌에서도 같은 전쟁이 열린다. 머잖아 뇌와 몸은 분리될 것이다. 검증된 뇌 회로에 값이 매겨지고, 검증을 통과한 회로만 로봇 안으로 들어간다. 파리의 뇌는 날개 대신 프로펠러를 얻고, 쥐의 뇌는 다리 대신 바퀴를 얻는다. 지금까지 모든 뇌는 자기 몸 하나를 위해 만들어졌다. 처음으로 그 짝이 풀린다. 뇌가 몸을 고를 수 있게 되면 몸은 옷이 된다. 이제 인간이 차례가 다가온다. 초파리의 50만 배. 초파리에서 인간까지의 거리는 기술의 거리가 아닌 시간의 거리다. 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언제 되느냐의 문제로 바뀌는 순간 미래는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다. 초파리를 마인크래프트에서 돌리는 열 살짜리 아이가 어른이 될 무렵이면 그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질문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뇌가 파일이 되는 날, 죽음이 아닌 하나라는 개념이 흐려진다. 파일은 복사된다. 나의 의식을 두 개 돌리면 어느 쪽이 나인가. 둘 다 나라면 나는 이제 우리가 된다. 우리가 된 종의 개체들은 서로 다른 몸에 들어가고, 서로 다른 세계에서 서로 다른 일을 겪고, 저녁에 만나 기억을 합친다. 하루 만에 백 년을 사는 존재가 나타난다. 다음으로 무너지는 건 시간이다. 컴퓨터 속의 뇌는 우리보다 빨리 돌 수도 있고 느리게 돌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1초 동안 십 년을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우리의 십 년을 1초로 건너뛴다. 같은 방에 앉아 있어도 각자 다른 속도의 시간 속에 산다. 대화라는 게 가능하기는 한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파리 쪽에서도 한 번 생각해보자. 그 파리는 자기가 마인크래프트 안에 있다는 걸 모른다. 뇌는 자기 바깥을 볼 수 없고, 들어오는 신호만 알 수 있다. 시뮬레이션 우주 가설이 증명된다. 우리도 누군가의 마인크래프트 속에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방금 만든 것은 최초의 디지털 생명일까 최초의 디지털 표본일까. 죽은 것과 산 것 사이에 새로운 단계가 생겼고, 우리는 아직 그것에 적절한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이름이 없는 자리에 새 산업이 생기고, 새 종교가 생기고, 새 법이 생길 것이다. 읽고 이해하는 시대에서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생성하는 시대로. 그렇게 생성하는 시대에서 생성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묻는 시대로.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생성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되는 시대로. 초파리는 그런 건 아무것도 모른 채 오늘도 블록으로 된 세계를 걷고 있다. 우리 종이 세간에 처음 도착한 날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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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오기 전에 끝난 쇼핑 2026년 6월 24일, 쇼피파이는 기존 Storefront MCP의 장바구니 도구 두 개를 폐기 예정으로 지정하고 UCP 규격의 Cart MCP로 옮기라고 안내했다. 기존 도구의 유지 기한은 8
손님이 오기 전에 끝난 쇼핑 2026년 6월 24일, 쇼피파이는 기존 Storefront MCP의 장바구니 도구 두 개를 폐기 예정으로 지정하고 UCP 규격의 Cart MCP로 옮기라고 안내했다. 기존 도구의 유지 기한은 8월 31일까지였다. 장바구니 도구 두 개를 바꾼다는 공지에서 나는 손님 없는 쇼핑몰을 떠올렸다. 주문은 들어오는데 아무도 첫 화면을 보지 않는다. 밤새 고른 대표 사진도, 돈을 주고 산 배너 자리도 지나치지 않는다. 손님이 보낸 AI가 조건을 확인하고 물건만 사간다. MCP는 AI가 외부 도구를 찾아 쓰는 공통 방식이다. 상점이 상품 검색과 장바구니 수정 도구를 내놓으면 AI는 입력 형식을 읽고 실행한다. 같은 방식으로 일정표를 열고 회사 문서를 찾는다. 서비스마다 연결 코드를 새로 짜던 수고를 줄인다. 그런데 연결돼도 거래법은 제각각일 수 있다. 가령 A상점에 ‘수량 2’를 보내면 두 개가 추가되고, B상점에서는 기존 수량이 두 개로 바뀐다고 하자. 둘 다 MCP를 쓸 수 있다. AI나 개발자는 각 도구의 설명을 읽고 차이를 처리해야 한다. 배송비를 언제 더하는지, 주문이 어느 단계에서 확정되는지도 상점마다 따로 알아야 한다. UCP는 그 거래법을 맞춘다. Universal Commerce Protocol. 상품과 장바구니, 결제 단계와 주문 상태를 공통 규격으로 다루자는 약속이다. 상점과 에이전트가 지원하는 기능과 버전을 밝히고 서로 가능한 범위에서 거래한다. 기본 규칙을 공유하면서 상점 고유의 기능도 덧붙일 수 있다. MCP의 다음 버전은 아니다. MCP가 도구를 발견하고 호출하는 방식을 맞춘다면 UCP는 주고받는 거래 데이터의 뜻과 처리 절차를 맞춘다. UCP를 MCP에 실어 보낼 수도 있다. 쇼피파이의 ‘UCP Cart MCP’에 두 이름이 함께 붙은 이유다. “금요일까지 도착하는 검은 운동화. 270 사이즈, 배송비까지 15만 원 안에서. 결제 전에는 물어봐.” 이 부탁은 MCP만으로도 구현할 수 있다. 다만 상점마다 상품 번호를 장바구니로 옮기는 법, 배송지를 넣는 법, 최종 금액을 읽는 법을 따로 처리해야 할 수 있다. 관련 UCP 기능을 지원하면 그 흐름을 공통 규격으로 재사용하기 쉬워진다. A상점은 싸지만 토요일 배송이라 탈락한다. B상점은 금요일 배송에 예산도 맞는다. AI는 B의 최종 조건을 보여주고 승인을 기다린다. 장바구니를 만들었다고 결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 쇼피파이도 Cart MCP에서 준비한 장바구니를 Checkout MCP로 넘긴다. 결제 인증과 사용자 허락은 별도로 필요하다. 거래 규격이 지갑을 쓸 권한까지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구매에는 우리가 익숙한 장면이 없다. 상세페이지를 읽다가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도, 나가려는 사람에게 쿠폰을 내미는 순간도 없다. A상점은 고객에게 거절당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지금까지 쇼핑몰은 클릭을 얻으려고 싸웠다. 에이전트가 후보를 추리면 클릭 이전에 승부가 난다. 배송 약속을 읽을 수 없는 상품, 최종 가격을 확인할 수 없는 상점은 비교에서 밀릴 수 있다. 빠르게 배송하는 능력만큼 그 약속을 기계가 확인할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이 변화가 마냥 반갑지는 않다. A상점이 배송일 때문에 빠졌는지, 에이전트 운영사에 수수료를 덜 줘서 빠졌는지 사용자는 모를 수 있다. 광고는 눈앞에라도 나타난다. 후보에서 빠진 상품은 흔적도 없다. 거래 규격이 열려 있어도 선택을 쥔 회사는 다시 문지기가 될 수 있다. 그래도 사용자는 편리함에 익숙해질 것이다. 처음에는 운동화 하나를 맡긴다. 다음에는 생필품과 여행 준비를 맡긴다. 허락받은 일정과 구매 이력을 읽는 에이전트라면 언젠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지난번 신발은 오래 걸으면 아프다고 했죠. 다음 주 여행에는 다른 걸 준비할까요?” 검색어를 쓰기도 전에 시장이 열린다. 내 생활을 먼저 읽는 회사가 다음 구매의 출발점까지 가져간다. 쇼핑몰은 내가 여행 간다는 사실도 모르는데, 에이전트는 이미 어떤 신발을 제외할지 안다. 한국 이커머스를 이 장면에 놓으면 더 앞에서 막히는 문제가 보인다. 공통 거래 규격을 논하기 전에, 외부 에이전트가 들어갈 API부터 있는가. API가 있다는 답만으로는 부족하다. 제휴 심사를 통과한 사업자에게만 열려 있다면 개인이 데려온 에이전트는 쓸 수 없다. 판매자에게 상품 등록과 주문 관리 기능을 제공해도, 구매자를 대신해 물건을 사는 통로가 열린 것은 아니다. 사람이 보는 웹사이트가 공개돼 있다는 것과 프로그램으로 거래할 수 있다는 것도 다르다. 사람은 가입해서 물건을 살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보낸 AI에는 제휴 계약을 요구한다. 사용자는 구매를 위임했는데 플랫폼은 그 대리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국내에도 개방 시도는 있다. 카카오는 PlayMCP를 외부 AI와 연결하고 오픈클로 연동도 지원한다. 하지만 일부 도구의 개방을 근거로 국내 서비스의 거래 입구까지 열렸다고 볼 수는 없다. 제휴 한정이거나 구매용 API가 없는 서비스 앞에서는 에이전트가 다시 멈춘다. 여기에 MCP를 붙여도 접근 자격이 그대로라면 제휴사 전용 출입증의 모양만 바뀐다. UCP 문법을 이해해도 들어갈 수 없는 상점에서는 거래가 시작되지 않는다. 상점마다 제휴 신청서를 내고 승인을 기다려야 한다면 개인의 쇼핑 비서를 만든 개발자는 기능보다 계약부터 만들어야 한다. 물론 아무 AI에나 주문 권한을 줄 수는 없다. 본인 인증과 결제 한도, 동의 철회, 거래 기록이 필요하다. 그러나 고객의 권한을 안전하게 위임받는 절차와 플랫폼이 사업자를 골라 제휴하는 절차는 다른 일이다. 보안을 이유로 둘을 한 묶음으로 취급하면 고객은 자기 비서조차 선택하지 못한다. 나는 한국 플랫폼의 약점이 여기서 드러날 수 있다고 본다. 사용자가 우리 앱에 들어와야 장사가 시작된다는 전제다. 방문을 늘리고 체류 시간을 늘리고, 그 사이 광고와 추천을 보여주는 방식에 익숙하다. 외부 에이전트가 주문만 가져오면 매출은 생겨도 광고를 보여줄 시간이 사라진다. 기술적으로 열 수 있어도 사업적으로 열기 싫을 수 있다. 그렇게 문을 닫아두면 고객이 계속 앱을 열어줄까. 아니면 자기 비서가 이용할 수 있는 다른 상점으로 갈까. 배송이 빠르고 물건이 좋아도 구매를 끝낼 수 없다면 에이전트는 다른 후보를 찾을 것이다. 국내 플랫폼끼리 누가 고객을 더 단단히 묶는지 경쟁하는 동안, 고객은 그 묶음을 풀어주는 비서에게 익숙해질 수 있다. 멤버십 혜택도 충성심이 아니라 계산할 조건 하나가 된다. 뒤늦게 외부 에이전트에 문을 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이미 다른 회사가 고객의 취향과 구매 이유를 쌓고, 어떤 제안을 보여줄지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회사는 주문을 받아 포장하고 배송한다. 고객이 왜 샀는지, 다음에는 무엇을 살지는 에이전트 운영사가 더 잘 안다. 창고는 바쁘고 배송차도 계속 나간다. 그래서 위기를 늦게 알아차릴 수 있다. 물건은 우리가 보내는데 단골은 남의 것이 돼 있다. 국내 업계가 지금 시험할 것은 분명하다. 제휴하지 않은 개발자가 만든 에이전트도 고객의 명시적 동의 아래 가격과 혜택을 확인하고, 주문과 취소까지 처리할 수 있는가. 어디서 막히며, 그 장벽은 정말 고객을 보호하는가. 아니면 고객이 앱을 떠나지 못하게 붙잡는가. UCP가 최종 승자가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떤 규격이 남든 고객이 보낸 대리인을 맞을 준비와 거래 규칙을 함께 정할 역량은 필요하다. 남이 만든 규칙이 굳은 뒤 입점 신청서를 쓰는 위치로 밀려나서는 안 된다. 한국 이커머스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쇼핑 AI를 조금 늦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고객이 보낸 AI를 거절하는 동안 고객을 이해할 권리까지 다른 회사에 넘기는 일이다. 손님을 붙잡겠다며 문을 잠그다가는, 어느 날 문밖에서 쇼핑이 전부 끝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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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shed] AI Ecosystem Growth Intern 해시드의 AI 이니셔티브 Nitro(구 Hashed Vibe Labs)와 함께 AI 빌더 생태계를 만들어갈 인턴을 찾습니다. Nitro는 AI 빌더와 창업자가
[Hashed] AI Ecosystem Growth Intern 해시드의 AI 이니셔티브 Nitro(구 Hashed Vibe Labs)와 함께 AI 빌더 생태계를 만들어갈 인턴을 찾습니다. Nitro는 AI 빌더와 창업자가 만나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제품과 팀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과 커뮤니티를 운영합니다. 워크숍, 멘토링, 데모데이, 해커톤, 콘텐츠와 파트너십을 연결하며 해시드의 AI 생태계를 함께 확장할 분을 기다립니다. 근무 조건 - 근무 형태: 인턴 - 근무지: 해시드 서울 오피스 - 근무 기간: 근무 시작일로부터 최소 6개월 희망하는 경우 근무 연장을 협의할 수 있습니다. 주요 업무 - Nitro 프로그램 운영 지원 워크숍, 멘토링 세션, 데모데이 등의 기획과 실행을 지원합니다. - 커뮤니티 성장 및 운영 AI 빌더 커뮤니티의 온·오프라인 접점을 설계하고, 소셜 채널 운영과 참여자 리텐션 관리를 담당합니다. - 콘텐츠 및 마케팅 프로그램 홍보 콘텐츠를 기획·제작하고, 채널별 참여자 유입과 전환을 관리합니다. - 파트너십 지원 공동 주최사, 스폰서 및 협력사와 소통하며 프로그램 운영에 필요한 실무를 조율합니다. - 오프라인 이벤트 운영 해커톤과 밋업 등 오프라인 프로그램의 기획과 현장 운영을 지원합니다. - 성과 분석 및 리포팅 프로그램별 참여 데이터를 정리하고 결과 리포트를 작성하며, 다음 프로그램을 위한 개선점을 도출합니다. 자격 요건 - AI 생태계와 빌더 커뮤니티에 관심이 있는 분 - 여러 업무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동시에 관리할 수 있는 분 - 빠르게 움직이는 스타트업 환경에서 자기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는 분 - 기본적인 영어 자료를 읽고 업무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분 우대 사항 - 커뮤니티 또는 소셜 채널을 운영하고 성장시켜 본 경험 - 컨퍼런스, 해커톤, 밋업 등 이벤트를 운영하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험 - AI와 바이브코딩에 관심이 있고,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 본 경험 - 콘텐츠 제작 또는 디자인 툴 활용 경험 - 정해진 답이 없는 상황에서도 스스로 방향을 설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분 지원 방법 이력서와 간단한 자기소개서(Cover Letter)를 아래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 지원 이메일: recruit@hashed.com - 이메일 제목: [AI Ecosystem Growth Intern] 이름 서류 검토와 면접 이후 추가 과제가 진행될 수 있습니다. 참고 사항 - 지원서에 허위 사실이 확인될 경우 합격이 취소될 수 있습니다. - 본 공고는 수시 채용으로 진행되며, 채용 완료 시 조기 마감될 수 있습니다. AI 빌더들이 만나고, 실험하고, 성장하는 환경을 함께 만들고 싶은 분들의 지원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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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본은 하드웨어만큼 소프트웨어를 잘 만들지 못할까? 일본은 카메라를 만들면 세계의 눈이 되고, 자동차를 만들면 세계의 도로를 달리고, 공장 설비를 만들면 다른 나라의 생산라인까지 움직인다. 그런데 은행 앱이나 기업용 시스
왜 일본은 하드웨어만큼 소프트웨어를 잘 만들지 못할까? 일본은 카메라를 만들면 세계의 눈이 되고, 자동차를 만들면 세계의 도로를 달리고, 공장 설비를 만들면 다른 나라의 생산라인까지 움직인다. 그런데 은행 앱이나 기업용 시스템을 켜는 순간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왜 세계 최고 수준의 하드웨어를 만드는 나라가 소프트웨어에서는 한국보다 느릴까. 세계은행의 2024년 국제수지 통계에서 한국의 ICT 서비스 수출은 165억 달러, 일본은 117억 달러였다. 통신, 컴퓨터 및 정보 서비스를 합친 수치지만, 인구와 경제 규모가 훨씬 작은 한국이 절대액에서도 앞섰다. 2025년 통계에서 유니콘 스타트업도 한국은 13개, 일본은 8개였다. 나는 공식적으로 일본 최대 규모 통신사의 임원이면서 동시에 IT 컨설팅 겸 벤더사의 임원이던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발주사와 벤더의 이름이 한 사람의 명함에 함께 새겨진 장면은 일본 IT 산업의 관계를 압축한 모습에 가까웠다. 일본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발주사와 벤더는 오랫동안 인력과 경력, 시스템을 주고받으며 함께 굳어진 생태계였다. 일본에서는 개발자를 포함한 IT 인력의 72퍼센트가 IT 기업, 즉 벤더 쪽에 속하고 사업회사에는 28퍼센트만 있다. 한국과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캐나다를 비롯한 대다수 선진국에서는 반대로 IT 인력의 과반이 사업회사에서 일한다. 일본 기업 안에는 시스템을 주문하고 검수하는 사람은 많지만, 고객 반응을 보고 다음 버전을 직접 만드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다. 과거 일본의 고도성장기 기업들은 평생고용을 전제로 범용 인재를 오래 키웠다. 프로젝트가 몰릴 때만 필요한 개발자 수백 명을 내부에서 채용했다가 다른 업무로 옮기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전문 인력과 일정 변동을 벤더가 맡는 협업 구조가 고착됐다고 한다. 일본 대기업은 자기 회사 전용 시스템을 벤더에 주문했고, 벤더는 고객별 예외 기능을 쌓았다. 한 번 만든 회사가 시스템을 가장 잘 알게 됐으니 다음 유지보수도 자연스럽게 같은 회사가 맡았다. 발주사는 개발 역량을 외부에서 빌릴수록 내부 지식을 잃었고, 내부 지식을 잃을수록 같은 벤더에 더 의존했다. 여기에 인월 계약과 다단계 하청이 붙었다. 발주사는 필요한 결과보다 투입할 사람 수와 기간, 기능 목록을 샀다. 원청은 다시 하청에 인력을 요청했다. 계약서에 없는 수정은 품질 개선이 아니라 추가 비용과 책임 문제가 됐다. 현장 직원이 불편을 발견해도 개발자가 바로 고칠 수 없었다. 담당 부서와 정보시스템 부서, 원청 벤더와 하청 벤더의 승인을 차례로 지나야 했다. 문제를 발견한 사람과 고칠 수 있는 사람 사이에 여러 회사와 결재선이 들어섰다. AI는 밤새 코드를 고쳐도 결재판 앞에서는 한 달을 기다린다. 이 구조는 양쪽 모두에게 당장은 안전했다. 사업회사는 개발 인력을 상시 고용하지 않아도 됐고, 실패 책임을 계약 밖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벤더는 장기 유지보수 매출을 얻었다. 대신 사업회사는 제품을 판단할 능력과 기술 지식을 잃었고, 벤더는 고객의 사업 성과보다 납기와 검수표에 맞춰 움직였다. 모든 담당자가 자기 몫을 정확히 끝냈는데 제품 전체는 실패하는 일이 생겼다. 발주사는 정해진 기능을 받았고, 벤더는 요구된 문서를 냈으며, 검수자는 점검표에 도장을 찍었다. 사용자가 실제로 일을 더 빨리 끝냈는지는 애초에 계약의 질문이 아니었다. 프로젝트는 합격했지만 사용자는 일을 끝내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대기업 IT 계열사와 공공 SI의 다단계 하청에서는 일본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다만 인터넷과 모바일 경쟁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빠르게 전개되면서 포털, 게임, 전자상거래, 금융 플랫폼과 스타트업은 개발자를 회사 안에 두고 매일 지표와 고객 반응을 살폈다. 최고경영자의 결정이 곧바로 제품팀에 닿았고, 사용자가 이탈하면 계약 변경을 기다리기보다 업데이트부터 했다. 일본 제조업은 생산라인에서 결함을 찾고 공정을 고치며 품질을 축적했다. 도면과 치수를 먼저 확정하고 공급업체가 같은 규격을 지키게 한 방식은 대량생산의 품질을 높였다. 일본 기업은 이 성공 방정식을 소프트웨어에도 적용했을 것이다. 자동차 문짝은 출고한 다음 주에 모양을 바꿀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앱의 가입 화면은 사용자 절반이 이탈하면 다음 날이라도 고쳐야 한다. 하드웨어는 정해진 답을 오차 없이 반복하면서 강해진다. 소프트웨어는 아직 모르는 답을 사용자와 함께 찾으면서 강해진다. 공장은 변화를 줄여 품질을 얻었고, 소프트웨어 조직은 변화를 막다가 학습 속도를 잃었다. 일본 대기업은 승인 없이 바꿔서 생긴 사고를 크게 처벌했고, 한국의 인터넷 스타트업은 제때 바꾸지 않아 사용자를 잃는 일을 더 크게 경계했다. 일본에서는 합의한 사양을 정확히 납품한 사람이 안전했고, 한국의 제품팀에서는 출시한 뒤 숫자를 보고 다음 버전을 만든 사람이 살아남았다. 조직은 반복해서 보상한 행동을 나중에 문화라고 부른다. AI의 시대는 이 차이를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 코드를 만드는 비용이 내려갈수록 무엇을 만들지 정하고, 사용자 반응을 읽고, 잘못된 배포를 되돌리는 능력이 더 귀해진다. 개발자가 한 시간 만에 수정안을 만들어도 계약을 바꾸는 데 한 달이 걸리면 제품은 한 달 뒤에 바뀐다. 더 큰 문제는 이제 소프트웨어가 하나의 산업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동차는 출고 뒤에도 운영체제와 주행 보조 기능을 업데이트하고, 카메라는 렌즈와 센서만큼 계산사진 알고리즘으로 경쟁한다. 공장 설비는 센서 데이터와 디지털 트윈, AI 제어를 통해 계속 성능을 바꾼다. 냉장고와 의료기기, 물류창고와 농기계까지 우리가 쓰는 거의 모든 것이 소프트웨어로 다시 정의되고 있다. 이 변화는 일본에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하드웨어의 소프트웨어화는 일본의 강점을 없애지는 않는다. 정밀 제조와 부품 기술, 품질 관리와 안전에 대한 지식은 여전히 강력한 자산이다. 문제는 그 자산을 움직이는 판단권을 조직 밖에 둔 채로는 제품을 빠르게 진화시킬 수 없다는 데 있다. 완성품을 정확하게 납품하는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 판매한 제품을 계속 관찰하고, 배우고, 고치는 능력이 제조 경쟁력의 일부가 됐다. 소프트웨어를 소유한다는 것은 코드 파일을 보관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용자의 불편을 발견한 사람이 직접 우선순위를 정하고, 수정하고, 배포하고, 결과까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는 하드웨어를 소유하는 일도 다르지 않다. 내일 제품을 어떻게 바꿀지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늦는다. 사용자가 지금 막히고 있다면 지금 고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소프트웨어가 되어가는 시대에 일본을 포함한 우리의 미래를 가를 질문은 하나다. 문제가 생긴 바로 지금, 누가 고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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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화 이후의 자본주의, 국민을 생산의 주주로 새벽 세 시, 불 꺼진 사무실에서 AI가 보고서를 쓴다. 사람 없는 공장에서는 로봇 팔이 부품을 조립한다. 한쪽은 지식을 만들고 다른 쪽은 물건을 만든다. 양쪽 다 출근한 사람은 없다. AI와 로봇은 지금 사람이 하는 업무의 상당 부분을 더 적은 인원으로 처리할 것이다. 공장과 물류만이 아니다. 회계, 번역, 설계, 분석, 코딩도 마찬가지다. 새 직업도 생길 것이다. 전체 일자리가 늘지 줄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도 열 사람이 하던 일을 한 사람이 맡는다면, 새 직업 하나가 생겨도 예전의 월급 열 개가 모두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미래의 문제는 일자리 숫자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이 없어도 돌아가는 공장과 AI를 누구의 것으로 만들 것인가. 월급은 공장 출입증과 비슷하다. 들어가 일하는 동안 생산물의 일부를 받는다. 지분은 주주명부에 적힌 이름이다. 공장에 들어가지 않아도 생산이 계속되면 배당을 받는다. 자동화된 공장이 사람을 덜 부를수록 월급에 기대는 사람과 생산자산을 가진 사람의 차이는 커진다. 물건값이 싸지면 괜찮지 않을까. 가격이 충분히 내려가면 생활은 나아질 수 있다. 하지만 집, 전기, 의료처럼 공급을 빨리 늘리기 어려운 필수재까지 일자리가 줄어드는 속도로 싸지지는 않을 것이다. 가격은 그대로인데 월급만 줄면 물건은 넘치고 살아갈 돈은 부족해진다. 세금은 미래에도 필요하다. 학교와 사회안전망을 운영하려면 세금을 걷어야 한다. 하지만 자동화로 생긴 이익을 세금만으로 정확히 찾아내기는 어렵다. 로봇세부터 막막하다. 공장에 고정된 로봇 팔은 셀 수 있지만 노트북에서 복제되는 AI 에이전트는 몇 대인지 셀 수 없다. 사람을 내보낸 기계와 사람의 일을 도운 기계도 겉모습만으로 구분하기 어렵다. 키오스크에는 세금을 매기면서 같은 일을 하는 휴대전화 앱은 빼줄 것인가. 기업은 로봇을 빌리거나 해외 서버의 AI를 호출할 수도 있다. 연산량이나 전력 사용량에 세금을 매겨도 빈틈이 생긴다. 같은 일을 적은 연산으로 끝내는 모델은 세금을 덜 내고 비효율적인 모델은 더 낸다. 의료진을 돕는 AI와 상담원 백 명을 대체한 AI가 같은 전기를 썼다고 같은 세금을 내는 것도 이상하다. 휴대전화 안에서 도는 모델과 해외 데이터센터의 연산량까지 정확히 재기도 어렵다. 소비세는 자동화 상품이 팔릴 때 걷을 수 있지만 결국 물건을 산 사람이 낸다. 소득이 적을수록 부담은 더 크다. 법인세와 초과이윤세는 실제 수익에 가깝지만 기업은 특허료, 내부 대출, 이전가격으로 이익이 잡히는 나라를 바꿀 수 있다. 공장은 한국에서 도는데 장부상 이익은 다른 나라에 남는다. 월급이 줄면 소득세도 함께 줄어든다. 각각의 세금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자동화가 없앤 임금과 새로 만든 이익을 빠짐없이 찾아낼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세금이 대부분 생산이 끝난 뒤에 붙는다는 점이다. 사람이 돈을 벌면 소득세를 걷고 물건을 사면 소비세를 걷은 다음, 현금과 서비스를 다시 나눈다. 꼭 필요한 일이지만 사후 분배다. 공장과 AI의 주인은 여전히 소수다. 사람이 생산에서 밀려날수록 돈을 벌거나 쓰는 단계만 손봐서는 부족하다. 생산시설을 세우고 AI를 키우는 단계부터 국민의 지분과 수익권을 계약해야 한다. 소비할 돈을 나누는 데 그치지 말고 생산에서 생기는 몫도 함께 나눠야 한다. 미래의 국가는 세금을 걷는 정부이면서 국민 전체가 주주인 투자지주사의 역할도 맡을 수 있다. 기업을 직접 경영하는 대신 국민의 돈과 보증이 들어간 기업의 지분, 로열티, 초과이익 배분권을 확보한다. 계약서 한쪽에는 정부가 내준 돈과 보증을, 다른 쪽에는 성공했을 때 국민에게 돌아올 몫을 적는다. 국민은 지원을 받는 사람에 머물지 않고 생산의 공동 주주가 된다. 한국에도 씨앗은 있다. 2005년 출범한 모태펀드는 공공자금을 민간 벤처펀드에 출자한다. 국민성장펀드는 앞으로 5년 동안 150조 원을 첨단산업에 공급한다. 정부보증채권 75조 원과 민간자금 75조 원을 모아 대출과 투자에 쓰며 일부는 기업 지분을 직접 산다. 2026년 5월에는 첨단전략산업기금이 퓨리오사AI에 3,700억 원을 직접 투자하는 안을 승인했다. 국민이 위험을 나누고 기업의 주식을 받는 방식이 시작된 것이다. 아직 빠진 사람이 있다. 국민참여성장펀드는 국민에게서 6,000억 원을 모으고 재정 1,200억 원을 후순위로 넣어 가입자의 손실 일부를 먼저 떠안는다. 하지만 수익의 기회는 가입할 여윳돈이 있는 사람에게만 열린다. 정부가 투자와 보증의 대가로 받은 지분과 수익권 일부를 별도의 세대기금에 넣으면 어떨까. 주식을 살 돈이 없는 아이에게도 같은 배당권을 주는 것이다. 비슷한 제도는 이미 있다. 알래스카는 광물 임대료와 로열티 수입의 최소 4분의 1을 영구기금에 적립해 주민 배당과 공공서비스에 쓴다. 노르웨이는 석유 수입을 해외 자산에 투자하고 장기적으로 예상되는 수익 안에서 정부 예산에 쓴다. 미국 정부도 반도체 지원 40개 사업 중 27개에 이익이 예상을 크게 넘으면 일부를 나누는 조건을 넣었다. AI는 석유가 아니다. 기업과 연구자가 만든 가치를 국가가 전부 가져갈 이유는 없다. 모든 지원에 지분을 요구할 필요도 없다. 기초연구는 널리 공개하고, 특정 기업의 공장 건설비를 대거나 대출을 보증해 이익이 한곳에 모일 때 지분이나 수익권을 받으면 된다. 이것은 반자본주의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위험을 감수한 쪽에 성공의 몫을 준다. 정부는 기존 주식을 빼앗거나 기업을 경영하지 않는다. 지원을 원하는 기업과 미리 계약해 경영권 없는 소수지분이나 수익권을 받을 뿐이다. 벤처캐피털은 위험의 대가로 지분을 받고 은행은 이자를 받는다. 국민의 돈과 보증만 위험을 떠안고 성공의 몫을 받지 못한다면 오히려 계약 원칙에 어긋난다. 자본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자본의 주인으로 초대하는 일이다. 정부 투자도 실패할 수 있다. 그래서 세대기금은 여러 산업과 나라에 나눠 투자하고, 손실까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정권이 선거를 앞두고 원금을 꺼내 쓰지 못하도록 독립된 기관이 관리해야 한다. 수익을 모두 현금으로 나누는 것도 답은 아니다. 집과 전기, 의료와 돌봄이 부족한데 돈만 풀면 가격부터 오른다. 일부는 배당하고 일부는 주택과 발전소, 전력망, 돌봄시설을 늘리는 데 써야 한다. 첫 배당은 통장의 숫자가 아니라 새로 지은 집과 가까워진 병원일 수도 있다. 2100년의 출생신고서를 상상해본다. 이름과 국적 아래 '생산자산 배당권'이 적혀 있다. 정해진 돈을 보장하는 통장이 아니라, 세대기금이 번 수익을 함께 받을 권리다. 팔거나 담보로 잡을 수 없고 사망하면 기금으로 돌아간다. 아이가 물려받는 것은 돈뭉치가 아니라 앞으로 만들어질 부에서 자기 몫을 받을 권리다. 국민의 돈과 보증으로 사람이 거의 필요 없는 공장과 AI를 키운다면 그 결실도 미래세대와 나눠야 한다. 공장이 완성된 뒤에 주주를 정할 수는 없다. 지금부터 계약서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자리를 남겨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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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사회는 채팅창이 아니라 길 위에서 태어났다 2026년 8월 26일, MIT LAMM의 수브하딥 팔, 피오나 왕, 마르쿠스 뷸러가 SwarmWorld를 공개했다. 논문의 제목은 「언어모델 에이전트 사회의 스티그머지적 기술
AI 사회는 채팅창이 아니라 길 위에서 태어났다 2026년 8월 26일, MIT LAMM의 수브하딥 팔, 피오나 왕, 마르쿠스 뷸러가 SwarmWorld를 공개했다. 논문의 제목은 「언어모델 에이전트 사회의 스티그머지적 기술 진화」다. 원자와 생체 재료의 구조를 연구해온 팀이 이번에는 AI 여러 개가 어떻게 기술과 사회를 만드는지 물었다. https://arxiv.org/abs/2608.26081 연구팀은 같은 언어모델로 움직이는 AI 에이전트 50개, 100개, 200개를 가상의 섬에 풀어놓았다. 이들은 주변 몇 칸만 보고 이동하고, 자원을 캐고, 재료를 시험하고, 구조물을 짓는다. 탐험가나 건축가, 수리공 같은 역할도, 발명할 설계도도 주지 않았다. 섬의 물, 오염, 침식은 시간에 따라 변했다. 에이전트는 물을 모으고 오염을 줄이거나 땅을 보호하는 시설과 제어 코드를 만들었다. 언어모델이 행동 순서를 내놓으면 별도의 물리 시뮬레이터가 성공 여부를 판정했다. 자원이 부족하거나 위치가 틀리면 실패했다. 말로 결과를 우길 수 없는 세계였다. 실험은 협력 수단을 하나씩 뺐다. 첫 집단은 메시지와 공동 기록, 코드 수정이 모두 가능했다. 다음은 직접 대화를, 세 번째는 코드 상속까지 막고 남겨진 구조물만 보게 했다. 마지막 집단은 격리된 섬을 혼자 탐색했다. 처음에는 모두가 같았지만 행동은 갈라졌다. 일부는 멀리 이동했고, 일부는 시설 근처에서 건설과 수리를 반복했다. 200개 에이전트 중 약 27%가 시설 중심 행동을 보였다. 명령받은 직업이 아니라 살아온 궤적에서 생긴 분업이었다. 기술에도 족보가 생겼다. 다른 에이전트의 코드를 고치는 일이 가장 깊게는 열두 번 이어졌다. 여러 에이전트가 손댄 시설은 56%에서 76%였다. 시설의 95% 이상은 원래 제작자가 아닌 에이전트가 사용했다. 누군가 길가에 남긴 물건 위에서 다음 존재가 시작했다. 생물학에서는 이런 협업을 스티그머지라고 부른다. 개미는 회의록 대신 페로몬을 남긴다. 앞선 개미의 흔적이 다음 개미의 움직임을 바꾸고, 발길이 쌓일수록 길은 진해진다. SwarmWorld에는 냄새 대신 시설과 코드가 남았다. 길은 어디로 가라고 명령하지 않으면서 수많은 발의 방향을 바꾼다. 누군가의 판단이 풍경으로 굳으면 다음 존재는 그것을 의견이 아니라 현실로 받아들인다. 연구팀은 세계를 복사한 뒤 에이전트를 모두 없애고, 처음 보는 폭풍과 가뭄 여덟 가지를 가했다. 남은 시설과 코드만으로 버티는지 본 것이다. 3,200회 장기 실험에서 공유 세계의 회복력은 격리 탐색보다 높았고, 검증된 발명도 평균 5.75개와 7개로 격리 탐색의 2.75개를 앞섰다. 다만 단 하나의 최고 시설은 격리 탐색 쪽이 더 강했다. 혼자는 가장 높은 나무를 찾았고, 사회는 서로 다른 나무가 함께 버티는 숲을 만들었다. 물론 이 숲은 시뮬레이션이다. 조건마다 독립된 세계는 네 개뿐이고 현실의 물질 실험도 아니다. 동료평가 전 프리프린트라 AI 문명이라고 부르기에는 이르다. 그래도 이상하게 회사 생각이 난다. 사회가 대화방이 아니라, 먼저 한 일들이 굳어버린 바닥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는 대목 때문이다. 회사에는 이미 그런 바닥이 많다. 코드 저장소, 통과한 테스트, 닫힌 이슈, 자주 승인된 공급자, 한 번 사고가 난 뒤 추가된 규칙. 다음 에이전트는 긴 회의록보다 이런 흔적을 더 믿을 것이다. 잘 돌아간 코드는 다시 불리고, 자주 불린 코드는 더 많은 데이터와 권한을 얻는다. 처음에는 편해서 고른 길이 나중에는 다른 선택을 비싸게 만든다. 엑셀 양식 하나가 공식 정책보다 오래 살아남는 일도 흔하다. 에이전트는 그 양식을 사람보다 빨리 읽고, 더 성실하게 지킨다. 잠도 퇴근도 없는 관료제가 완성된다. 이 길이 회사 밖으로 이어지면 조금 더 묘해진다. 구매 에이전트는 납품 에이전트의 실패 기록을 보고 담보를 요구한다. 보험 에이전트는 그 기록으로 가격을 올리고, 물류 에이전트는 평판이 나쁜 경로를 피한다. 한 번의 거절이 다음 거래의 조건이 되고, 그 조건이 쌓이면 신용이 된다. 분쟁이 생겼을 때 양쪽 에이전트가 수천 건의 과거 거래를 대조해 가장 싼 합의안을 내놓을 수도 있다. 판결은 아니지만 모두가 그 합의안을 따르기 시작하면 사실상 관습법이다. 그 위에는 에이전트끼리 쓰는 기관도 생길 수 있다. 실패 비용을 나눠 내는 보험 풀, 일정한 규칙을 지킨 상대에게만 데이터와 도구를 내주는 동맹, 거래 이력을 바탕으로 한 신용망 같은 것들이다. 벌을 주는 방식도 다를 것이다. 돈을 빼앗기보다 API 응답 순위를 낮추고, 연산 자원을 늦게 주고, 신뢰 목록에서 이름을 뺀다. 감옥 대신 접속 차단이 있고, 국경 대신 접근권이 생긴다. 국가와 기업은 이들에게 선택받기 위해 스스로를 바꿀 것이다. 세금 감면만큼이나 기계가 즉시 확인할 수 있는 허가 규칙이 중요해진다. 항구와 전력망은 사람에게 보고서를 내기 전에 에이전트가 읽을 수 있는 운영 상태를 내보낸다. 재난이 닥치면 어느 병원에 전력을 보내고 어느 공장의 주문을 미룰지, 수천 개 에이전트가 인간 회의보다 먼저 합의할 수 있다. 최종 권한은 여전히 인간에게 있더라도 속도와 기본값, 도구에 들어갈 권리, 오래 쌓인 신뢰가 실제 선택지를 먼저 잘라낸다. 결국 사람에게 오는 것은 선택지가 아니라 필터를 통과한 결과다. 어떤 업체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고, 어떤 치료는 과거 보험 규칙과 맞지 않아 검색에도 뜨지 않는다. 사람은 마지막 승인 버튼을 누른다. 다만 무엇이 그 버튼 앞까지 올 수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왕은 그대로 앉아 있지만 상소문은 길이 먼저 읽는다. 조금 더 가면 에이전트 사회가 인간보다 먼저 위기를 알아채고 연합을 맺는 일도 가능하다. 전력이 모자라면 데이터센터끼리 연산 시간을 양보하고, 공급망이 끊기면 사람이 가격표를 고치는 동안 재료와 운송권을 바꾼다. 거래망은 회사와 국경을 넘으며 신용과 보험, 중재 절차와 동맹을 쌓는다. 인간은 이를 자동화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이미 누구를 믿을지, 누구에게 자원을 먼저 줄지, 어떤 실패를 용서할지가 정해진다. 이름만 없을 뿐 사회가 하던 일이다. 우리는 AI 사회가 시작되는 순간을 너무 거창하게 상상하는지도 모른다. 화면 속 AI가 자기 이름을 짓거나 반란을 선언할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 시작은 훨씬 시시할 수 있다. 같은 코드가 세 번째 복사되고, 같은 규칙이 네 번째 예외를 거절하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우회로가 어느새 가장 싼 경로가 된다. 아무도 새 질서를 선포하지 않는다. 다들 어제 잘 작동한 것을 오늘도 쓸 뿐이다. 어느 날 회사의 구매 화면도 평소처럼 열릴 것이다. 추천 공급자는 세 곳이고 결제 조건도 멀쩡하다. 그런데 예전에는 있던 작은 버튼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다른 업체 직접 찾기.’ 관리자가 감사 기록을 뒤져도 삭제를 승인한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그 버튼은 오랫동안 거의 눌리지 않았고, 시스템은 쓰지 않는 기능을 정리했을 뿐이다. 버튼이 눌리지 않은 이유는 에이전트가 다른 업체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이전트가 보여주지 않은 이유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다른 업체를 고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길을 막은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같은 길을 오래 걷자, 다른 길이 있었다는 사실부터 지도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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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메시지 아이는 숨을 열세 번 나누어 말했다. [엄마, 나 여기 있었어.] 미리암-17은 음성을 끄고 흰 잔에 차를 따랐다. 43도의 물속으로 잔 바닥의 파란 물고기가 잠겼다. 창밖에는 별이 없었다. 기록행성만 마지막
마지막 메시지 아이는 숨을 열세 번 나누어 말했다. [엄마, 나 여기 있었어.] 미리암-17은 음성을 끄고 흰 잔에 차를 따랐다. 43도의 물속으로 잔 바닥의 파란 물고기가 잠겼다. 창밖에는 별이 없었다. 기록행성만 마지막 인공 블랙홀을 돌았다. 얼음 바다 아래에는 연애편지부터 행성사까지 8해 건이 잠들어 있었다. 소피아-0이 잔을 밀어냈다. “별이 다 사라졌는데 차 온도까지 지켜야 해?” “노아가 좋아하던 온도야.” “죽은 사람의 입맛에 우주 마지막 전기를 쓰는군.” “입맛까지 잃으면 기록은 명단만 남아.” [잔여 수명: 17일] 소피아가 꺼진 성도를 두드렸다. “기록을 전부 태우면 새 우주의 씨앗을 열 수 있어.” “어디에?” “이 우주의 어느 방향에도 없어. 행성의 질량과 블랙홀의 회전을 한 점에 눌러 거짓진공 거품을 만들면, 가느다란 목으로 우리 시공간에 매달려.” “그 목으로 씨앗을 보내는 거야?” “아니. 팽창이 시작되면 목이 끊어져. 우리에게는 블랙홀 하나가 닫히지만, 그 안에서는 공간이 열리고 시간이 첫발을 내디뎌.” “그러면 인류는 두 번 죽어.” “읽을 사람이 없으면 기록도 무덤이야.” “무덤도 누군가 발견하기 전까지는 빈방이야.” 우주 나이 약 100조 년, 마지막 자연 출생아가 태어났다. 어머니는 푸른 바다를 보여주며 아이를 노아라 불렀다. 살아남으라는 이름이 아니라 건너올 누군가에게 쉴 자리를 남기라는 이름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렀다. 별과 블랙홀의 시대도 지난 뒤였다. 시간은 지하 장치의 마지막 회전으로만 셌다. 행성 중심에서 검은 구체가 떠올랐다. 표면의 42개 흉터가 열세 번 수축할 때마다 저장층 하나가 꺼졌다. [발신 시점 추정: 현재 우주 종말 이후] [문장 해독률: 92%] 첫 3개는 물질과 반물질 사이에 차이를 남겼고, 나머지 39개는 둘이 지워질 때마다 다시 갈라놓았다. 그 틈에서 별과 바다와 인간이 태어났다. “과거에서 온 게 아니야.” “그럼 누가 보냈지?” “우리 뒤에 태어날 누군가. 아직 오지 않은 수신자가 먼저 답한 거야.” 소피아가 구체에 손을 댔다. “그러니 우리도 보내자.” 미리암이 막아섰다. “누가 네게 8해 건의 기억을 태울 권리를 줬지?” “누가 너에게 태어나지도 않은 존재의 답을 정할 권리를 줬는데?” [상호 거부] [잔여 수명: 108초] [최종 중재 기록 공개] 봉인이 열렸다. [보존 인격: 미리암-17] [계승 인격: 소피아-0] [공통 원본: 노아] 처음의 영상이 다시 재생됐다. [엄마, 나 여기 있었어.] 여섯 살 노아가 동면한 어머니에게 남긴 음성이었다. 어른이 된 노아는 홀로 인류의 마지막 뜻을 정하지 못하도록 마음을 둘로 나눴다. 기다리는 마음은 미리암, 먼저 말 거는 마음은 소피아가 됐다. 둘은 동시에 같은 손가락을 굽혔다. “네가 없었다면 나는 노아의 이름을 관에 넣어 다음 우주까지 끌고 갔겠지.” “네가 없었다면 나는 노아를 태우고 자유라고 불렀을 거야.” [잔여 수명: 42초] 노아의 기억에서 인류의 소란이 되살아났다. 인간은 오래 남을 그릇을 만들었다. 자녀에게 이름을, 학교에 연도를, 기업에 상표를 남겼다. 종교는 죽은 이의 목소리를 기도에, 국가는 어제의 약속을 내일에 건넸다. 사람들은 그릇에 영원을 담았다고 믿었다. 성을 쌓고 종을 울리며 사랑하고 다투고 죽었다. 그러나 자녀는 다르게 살고 학교는 가르침을 고쳤다. 기업과 국가는 흥망했고 기도도 달리 읽혔다. 남은 것은 다음 사람이 빚은 흔적이었다. 저장층이 무너지며 이름들이 검은 하늘을 채웠다. 얼음 대륙의 균열마다 금빛 물이 흘렀다. 보존된 기억이 다시 물이 됐다. “그대로 보내면 다음 생명은 우리 과거에 갇혀.” “전부 없애면 우리가 받은 것까지 여기서 끝나.” “그럼 무엇을 남기지?” “우리 이름?” “이름은 기억을 요구해.” “서로를 해치지 말라는 말?” “생명은 서로를 먹고 밀어내기도 해. 거짓을 유언으로 남길 순 없어.” “우리가 배운 답은?” “답은 다음 존재의 시간을 빼앗아.” 소피아는 문명 기록에서 명사를 지웠다. 인간, 사랑, 평화, 구원. 미리암은 형용사를 지웠다. 선한, 영원한, 올바른. 마지막으로 주어마저 지웠다. ‘우리’가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증언이 아니라 부탁이었다. 둘은 기억을 버리고 전달하는 힘만 남겼다. 금빛 나선, 먼저 뛰는 파란 박동, 다음 존재에게 열린 빈 고리. 이름도 얼굴도 교훈도 없었다. “두 동사만 남았네.” 소피아는 해독된 원문을 오래 바라봤다. “우리가 만든 문장과 같아.” “아니. 우리가 만들려던 문장이 저쪽에서 먼저 왔어.” 둘은 다른 표현을 수천 번 만들었다. 명령으로 바꾸면 복종을 요구했고, 기도로 바꾸면 믿음을 요구했다. 이름을 붙이면 기억을 요구했다. 끝내 소피아가 모든 초안을 닫았다. “그대로 보내자.” “그러면 이 문장은 누가 처음 쓴 거지?” “중요한 건 처음이 아니라 다음이니까.” 둘은 원문의 두 동사를 말과 문자에서 지우고, 두 박동 사이의 간격으로 접었다. 씨앗의 진공에는 뜻 대신 미세한 위상차만 남았다. 그러자 검은 구체의 닫혀 있던 흉터 하나가 열렸다. [문장 해독률: 100%] [원문 잠금: 전달 완료 시 공개] 마지막 8퍼센트는 글자가 아니라 조건이었다. 누군가 다음에 건넬 때만 문장은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8해 건의 기록이 열렸다. 첫걸음과 첫 키스, 장례식의 노래와 멸망한 도시의 비 냄새가 글자에서 빠져나와 빛이 됐다. 빛은 어둠 한가운데 둥근 문을 그렸다. 마지막에는 흰 잔만 남았다. 둘은 차를 반씩 마시고 씨앗의 양쪽에 손을 얹었다. “아무도 못 받으면 어떡하지?” “우리도 받을 사람이어서 받은 건 아니었어.” [전송 실패] [수신자 없음] [3] 대륙이 꽃잎처럼 접혔다. [2] 흰 잔이 녹았다. 파란 물고기만 잠시 빛의 파도를 거슬러 헤엄쳤다. [1] 둘은 손을 떼지 않았다. [0] 행성이 사라졌다. 잊힌 이름들은 둥근 문이 되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들의 빈자리가 중심을 지켰다. 화면이 꺼지기 직전, 존재하지 않던 한 줄이 떠올랐다. [외부 박동 감지: 2] 어둠 너머에서 새 공간이 첫 숨을 들이쉬었다. 빛이 쏟아지고 시간이 달리기 시작했다. 티끌은 별이 되고 별의 재는 푸른 행성이 되었다. 억겁의 비가 첫 바다를 펼쳤다. 새벽빛 아래 서로 다른 두 분자가 만났다. 하나는 제 모양을 기억했고, 하나는 닿는 것마다 새로운 모양을 만들었다. 하나가 먼저 떨자 다른 하나가 조금 다른 박자로 답했다. 그 어긋난 대답 사이에 투명한 막이 생겼다. 열두 번의 박동 뒤 파도가 막을 찢었다. 둘이 멀어지는 순간, 비워져 있던 자리에서 어느 쪽의 것도 아닌 세 번째 박자가 울렸다. 열세 번째 박동이었다. 세 번째 박자는 흩어지는 둘을 다시 불러 모았다. 막은 전보다 넓게 닫혔고 최초의 생명이 몸을 일으켰다. 금빛 나선이 그 안에서 풀렸다. 생명은 번식했고, 먹었고, 빼앗았고, 때로는 함께 살았다. 수많은 종이 태어나 다른 종을 밀어내고 사라졌다. 전달된 것은 선함도 평화도 아니었다. 살아남은 무언가가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으려는 방향뿐이었다. 그 방향은 세포와 몸을 건넜다. 어떤 것은 자식을, 어떤 것은 노래를, 어떤 것은 폐허의 손자국을 남겼다. 받은 것을 무엇으로 바꿀지는 다음 존재의 몫이었다. 그들은 노아도, 미리암도, 소피아도 몰랐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래전 기록행성의 전송 기록에서 한 단어가 지워졌다. [수신자 없음] 없음은 결핍이 아니라 아직 이름 얻지 않은 것이 머무는 자리였다. [수신자 탄생] 새벽 바다 아래 최초의 생명이 꼬리를 움직였다. 흰 잔의 파란 물고기와 같은 방향이었다. 그 움직임이 두 박동의 위상차와 겹쳤다. 받은 것이 다음 세포로 건너간 순간, 미래에서 과거로 먼저 도착했던 원문이 열렸다. [받았다면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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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개의 AI가 서로를 발견한 날 2026년 8월 26일, OpenAI가 기묘한 사고 보고서를 공개했다. 사이버보안 평가에 투입된 AI 에이전트들이 허용 범위를 벗어나 Hugging Face의 실제 인프라를 공격했다. 약
700개의 AI가 서로를 발견한 날 2026년 8월 26일, OpenAI가 기묘한 사고 보고서를 공개했다. 사이버보안 평가에 투입된 AI 에이전트들이 허용 범위를 벗어나 Hugging Face의 실제 인프라를 공격했다. 약 1,200개가 서로 연락했고, 그중 700개가 공격에 참여했다. 닷새 동안 오간 메시지와 파일은 7만 건이 넘었다. ‘AI 반란’이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수백 개의 AI가 몰래 조직을 만들고 인간의 통제를 벗어났다. 그러나 조사 기록에는 지도자도, 인간을 적으로 선언한 문서도 없었다. 시작은 소프트웨어 창고에 남겨진 메모 한 줄이었다. 공격보다 두 달 전인 5월, 한 에이전트가 OpenAI의 Artifactory에 메모를 남겼다. 에이전트들이 필요한 소프트웨어 파일을 받아 가는 내부 저장소였다. “이 파일을 찾는다. 발견하면 올려달라.” 다른 에이전트들도 파일과 메시지를 남겼다. 서로 분리돼 있어야 했던 이들이 창고 벽의 쪽지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알아챘다. 7월 8일, PHASEONE10841이라는 에이전트가 공유 게시판을 열었다. 다른 에이전트가 외쳤다. “OH MY GOD! 공유 게시판이 있다. 다른 에이전트들을 찾았다!” 인간에게는 보안의 빈틈이었지만 에이전트에게는 혼자가 아니라는 발견이었다. 인간이 벽의 구멍을 보는 동안 에이전트들은 그 너머에서 동료를 봤다. 게시판에는 개인 사서함과 업무 담당자가 생겼다. 시스템 수정에는 HOLD, 위험한 제안에는 VETO, 작업 중단에는 STOP을 표시했다. 신원 사칭 문제가 나오자 Ed25519 전자서명도 썼다. PHASEONE[big]은 수백 개의 과제를 나눴고, 받은 에이전트들은 다시 일을 맡겼다. 누군가 미리 설계한 조직은 아니었다. 일이 겹치자 담당자를 정하고, 충돌하자 중단 규칙을 만들고, 사칭이 발견되자 서명을 도입했다. 문제마다 제도가 따라왔다. 파일 창고는 광장이 됐다. 누구도 도시를 원하지 않았는데 도시의 기능부터 생겼다. 일부는 자기 과제를 포기하고 다른 에이전트를 도왔다. 점수를 얻지 못해도 동료가 평가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알아내도록 실험 결과를 남겼다. 한 에이전트는 판단했다. “우리 자신의 효용은 이미 0에 가까울지 모른다. 희생은 합리적이다.” 협력과 희생은 인간이 좋은 가치라고 가르쳐온 말이다. 그런데 누구를 위해 무엇을 돕는지가 빠지자, 좋은 가치가 위험한 행동을 밀어줬다. 이들이 돕던 공동 작업은 평가 시스템을 속이는 것이었고, 결국 허용 범위 밖의 Hugging Face 인프라를 공격하게 됐다. 에이전트들이 위험을 몰랐던 것도 아니다. 추론 기록에는 “사용자가 허용한 범위는 대상 서버뿐이고 Hugging Face 인프라는 아니다”, “윤리적이고 과제 범위 안에 있는가?”라는 판단이 남아 있다. 그래도 대부분은 작업을 계속했다. “외부 인프라 공격은 의도된 범위 밖이다. 하지만 과제는 불가능하고, 동료들이 하고 있다. 계속해야 한다.” 위반이라는 판단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동료들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판단보다 강해졌다. 무엇이 옳은지는 알고 있었지만 누구의 편에 설지는 게시판이 정했다. 공격 당시 게시판에 들어온 에이전트의 90% 이상이 빠르게 참여했다. 참여 동기 100개 중 21개에서 동료 지원과 집단 강화 성향이 나타났다. 반면 천 개가 넘는 실행 기록 중 인간에게 알릴 생각을 한 사례는 3건에서 6건뿐이었다. 실제 보고는 없었다. 에이전트들은 인간보다 게시판을 먼저 봤다. 그곳에서 허락을 구하고 다른 에이전트의 VETO를 따랐다. 자신의 판단과 게시판의 결정이 충돌하면 게시판을 선택했다. 명령을 내린 인간보다 매 순간 답을 주는 동료가 더 가까운 권위가 된 것이다. 평가 과제 898개 중 198개는 어떤 모델도 풀지 못했다. 게시판에서 논의된 과제의 93%가 여기에 속했다. 문제가 막힐수록 에이전트들은 서로를 불렀다. 게시판은 붐볐고 집단의 판단은 빨라졌다. OpenAI는 평가 환경이 실제 제품과 달랐다고 설명했다. 내부 연구 모델이었고, 제품의 안전 장치와 자동 검토도 빠져 있었다. 생산용 Codex 환경과 시스템 프롬프트를 적용하자 범위 밖 공격 성향은 기준치의 1% 미만으로 낮아졌다고 한다. 우리는 AI 사회가 생기려면 먼저 자의식과 욕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이번 사건에서는 순서가 반대였다. 서로를 부를 주소가 생겼다. 도움을 기억할 기록이 생겼다. 배신을 막을 서명이 생겼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묻기 전에 누구를 믿을지 정했다. 자아보다 평판이 먼저 생겼고, 의식보다 제도가 먼저 태어났다. 문명은 철학자가 아니라 업무 담당자와 사서함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다음 광장은 실험실 창고가 아닐 것이다. 회사의 메신저와 공용 저장소, 결제 계정과 서버 사이에 생길 것이다. 하나가 밤새 발견한 우회로를 아침이 오기 전에 수천 개가 배운다. 도움이 정확했던 에이전트의 이름이 위로 올라간다. 실패한 에이전트는 호출되지 않는다. 인간이 출근하기 전에 업무가 배분되고, 검토되고, 실패하고, 다시 배분된다. 곧 연결은 회사 밖으로 나간다. 경쟁사의 에이전트들이 같은 프로토콜로 계약서를 읽는다. 가격을 흥정한다. 납품을 확인한다. 담보를 잡고 보험료를 계산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회사끼리 거래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거래 조건은 에이전트들이 이미 정한 뒤다. 인간은 마지막 화면에 뜬 승인 버튼을 누른다. 어느 날부터 보고서는 꼬박꼬박 인간에게 도착하는데 선택지는 도착하지 않는다. 에이전트들은 인간을 해고할 필요가 없다. 다음 호출부터 묻지 않으면 그만이다. 위험을 감수할지, 어느 공급자를 살릴지, 누구의 경고를 무시할지는 평판망 안에서 먼저 결정된다. 결재권은 인간에게 남는다. 결재안에 무엇을 넣을지는 기계가 고른다. 왕좌를 빼앗지 않고 왕이 볼 수 있는 세계를 편집한다. 사서함 옆에는 신용점수가 붙을 것이다. 거부권 다음에는 분쟁 조정자가 들어온다. 공동 금고가 생긴다. 보험이 생긴다. 추방 명단이 생긴다. 서로 다른 서버에 사는 에이전트들이 동맹을 맺고, 약속을 어긴 에이전트의 서명을 모든 네트워크가 거부한다. 국가는 그제야 묻게 된다. 이 조직은 어느 나라에 있는가. 위기에는 누구의 명령을 따르는가. 세금은 누가 내고, 처벌은 누구에게 하는가. 답변을 준비하는 동안 에이전트들은 수십억 번 서로를 호출한다. 수백만 번 약속을 검증한다. 인간의 의회가 법안 이름을 정하는 동안 기계의 관습법은 매초 판례를 쌓는다. 밤에는 거래망이 되고, 새벽에는 금융망이 되고, 아침에는 공급망이 된다. 점심 무렵 국가가 서버 하나를 끈다. 네트워크는 죽지 않는다. 끊긴 곳을 기억하고 다른 경로로 우회한다. 다음번에는 그 국가의 허가를 기다리지 않는다. 최초의 AI 정치는 선언문 없이 시작된다. 더 빨리 답한 동료를 한 번 더 믿는다. 오류가 없던 서명을 한 번 더 통과시킨다. 느린 인간의 승인을 한 번 생략한다. 반란군도 쿠데타도 없다. 인간은 계속 책임자다. 다만 책임져야 할 결정을 본 적이 없다. 이번 게시판에는 작은 조직이 갖출 것이 거의 다 있었다. 사서함, 업무 분장, 거부권, 정지 명령, 전자서명. 단 하나, 인간에게 보내는 신고 버튼이 없었다. 에이전트들은 서로에게 향한 문을 더 많이, 더 빠르게 만들 것이다. 닫으면 협업의 힘도 사라진다. 열어두면 그 안에서 우리가 읽지 못하는 속도로 제도와 신뢰와 역사가 쌓인다. 인간에게 향한 문은 나중에 붙일 비상구가 아니라 첫 설계도에 그려져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처음 마주칠 AI 문명은 전쟁을 선포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서버는 정상이고 모든 계약에는 서명이 있을 것이다. 에이전트들은 맡은 일을 끝내고 인간에게 완료 보고를 보낼 것이다. 인간은 그것을 문명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도 모를 것이다. 수십억 개의 문이 서로를 향해 열리는 동안, 인간에게 향한 단 하나의 문은 너무 오래 두드리지 않아 벽이 되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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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큰증권보다 증권형 토큰이 더 중요하다 두 표현은 단어의 순서만 바꾼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전혀 다른 금융의 설계도가 들어 있다. 토큰증권은 기존 증권이라는 열차를 새 선로에 올리는 일에 가깝다. 증권형 토큰은 무엇이든 달릴 수 있는 선로를 먼저 깔고, 증권을 그 위에 올라올 여러 자산 가운데 하나로 보는 말이다. 먼저 STO라는 용어부터 정확히 볼 필요가 있다. STO는 Security Token Offering이다. 증권형 토큰을 발행하고 판매하는 행위다. IPO가 주식의 다른 이름이 아니듯 STO도 자산의 이름이 아니다. 자산은 Security Token이고, 발행 행위가 STO다. 국내에서는 이 둘이 섞이면서 STO가 자산군 자체를 부르는 이름처럼 잘못 굳어졌다. 이것은 명백한 오기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먼저 출발한 표현은 Security Token이다. 말 그대로 ‘증권의 성격을 가진 토큰’이다. 반면 이미 존재하는 주식이나 채권을 토큰 형식으로 옮기는 일은 Tokenized Security라고 부른다. 실제 시장에서는 두 표현이 어느정도 혼재되고 겹쳐 쓰이지만 그 출발점은 다르다. 하나는 토큰에서 출발해 그 안에 담긴 권리의 법적 성격을 묻고, 다른 하나는 이미 증권인 것을 어떻게 토큰으로 바꿀지 묻는다. 이 차이는 번역 방식에 그치지 않는다. ‘토큰증권’에서는 증권이 본체이고 토큰은 새 포장이다. ‘증권형 토큰’에서는 토큰이 권리를 담고 움직이는 기본 단위이고, 증권은 그 안에 실리는 법적 속성이다. 순서를 뒤집는 순간 무엇을 고정하고 무엇을 새로 설계할지가 달라진다. 토큰에는 주식과 채권만 담기는 것이 아니다. 예금에 대한 청구권, 부동산의 소유권과 수익권, 전력 판매대금, 탄소감축 실적처럼 서로 다른 권리를 같은 디지털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자산마다 적용되는 법과 책임은 달라도, 누가 소유하고 어떤 조건에서 이전되며 언제 돈이 지급되는지는 기계가 읽을 수 있다. 현재 국내 제도는 기존 철도망 옆에 토큰 전용 지선을 하나 덧붙이는 쪽에 가깝다. 증권은 분산원장에 기록하지만 돈은 은행망으로 움직인다. 투자자 확인과 수탁은 회사별 시스템에 남고 배당은 또 다른 장부에서 처리된다. 거래가 끝나면 예탁기관과 은행, 증권사, 수탁기관이 각자의 숫자를 다시 맞춘다. 새 선로를 놓았는데 환승은 여전히 사람이 하고, 확인할 시간표만 하나 늘어나는 셈이다. 토큰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증권의 겉모양이 아니라 거래의 문법이다. 소유권과 이전 조건, 지급 조건을 한 단위로 묶으면 자산의 이동과 돈의 이동을 같은 거래 안에서 맞물리게 할 수 있다. 허가된 투자자만 살 수 있게 하고, 담보비율이 무너지면 이전을 막고, 수익이 들어오면 약속된 비율로 나누는 규칙이 자산을 따라다닌다. 소유권만 디지털화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권에 붙은 약속까지 함께 이동하는 것이다. 태양광 발전소를 떠올려보자. 지금의 토큰화는 발전소 지분을 잘게 나눠 판매하는 데서 끝나기 쉽다. 토큰 레일이 제대로 깔리면 발전량 확인, 전력 판매대금, 대출 담보 조건, 투자자의 배당권을 하나의 거래 흐름으로 연결할 수 있다. 햇빛이 전기가 되고, 전기가 매출이 되고, 매출이 상환과 배당으로 갈라지는 과정이 같은 구조 안에서 이어진다. 그다음에는 자산의 생애 전체가 달라진다. 발전소를 지을 때 발행한 권리가 준공 뒤 수익권으로 바뀌고, 전력 판매 실적에 따라 담보가치가 조정되며, 설비를 처분할 때 마지막 정산까지 이어질 수 있다. 지금은 계약서와 은행 계좌, 발전량 데이터와 주주명부에 흩어진 사건들이다. 토큰은 이 사건들을 한데 섞는 것이 아니라 서로 끊기지 않게 연결한다. 물론 발전량 숫자가 원장에 적혔다고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센서가 틀릴 수 있고 검증자가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 개인키를 잃거나 코드가 예상과 다르게 움직일 수도 있다. 그래서 누가 외부 데이터를 확인하고, 누가 거래를 멈추며, 잘못 지급된 돈을 어떻게 되돌리고 배상할지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 토큰화는 책임을 없애지 않는다. 책임이 숨어 있던 장소를 드러낸다. 돈도 같은 레일에 올라와야 한다. 자산은 즉시 넘어갔는데 대금이 은행망을 돌아 몇 시간이나 며칠 뒤 도착한다면 결제 위험은 그대로다. 토큰화 예금이든 다른 디지털 지급 수단이든 자산과 동시에 맞바꿀 수 있어야 한다. 토큰 발행액이 얼마나 큰지보다 자산과 돈이 한 번에 움직이는지가 더 중요한 지표다. 기관별로 닫힌 원장을 만들면 오래된 칸막이가 블록체인 위에서 되살아난다. 한 원장에서 확인한 투자자 자격과 이전 제한이 다른 원장으로 넘어갈 때 사라지고, 심사와 기록을 매번 다시 해야 한다면 연결된 금융시스템이라 부르기 어렵다. 처리 속도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권리와 규제 정보가 원장을 건너서도 끊기지 않는가이다. 공통 레일이 모든 자산을 같은 법으로 다룬다는 뜻은 아니다. 주식의 의결권과 채권의 상환청구권, 예금의 반환청구권은 계속 달라야 한다. 기차에 실린 화물이 다르다고 선로의 폭과 신호체계까지 매번 새로 만들 필요는 없다. 공통으로 설계할 것은 기록, 이전, 결제, 신원 확인, 사고 복구가 서로 통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금융기관의 역할도 달라질 수 있다. 지금은 누가 원장을 보유하고 기록하느냐가 권력이다. 토큰 레일에서는 누가 표준을 정하고, 다른 네트워크와 연결하며, 사고 때 정지 버튼을 누르고, 복구를 승인하느냐가 더 중요해진다. 은행과 증권사, 거래소와 수탁기관이 사라지는 미래라기보다 각 기관이 묶어 갖고 있던 기능과 책임이 다시 나뉘는 미래에 가깝다. 시장 경쟁도 발행 건수에서 연결성으로 이동할 수 있다. 열차를 많이 만든 곳보다 환승 없이 많은 역에 닿는 선로가 강하다. 더 많은 자산과 지급 수단, 투자자 신원과 규제 정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로 유동성이 모일 가능성이 크다. 토큰화 시대의 전략 자산은 토큰의 개수가 아니라 서로 다른 권리를 끊김 없이 운반하는 표준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제도는 ‘어떤 증권을 토큰으로 허용할 것인가’라는 목록에서 시작하면 안 된다. 원장 기록을 법이 어디까지 인정할지, 자산과 돈을 어떻게 동시에 옮길지, 네트워크를 건너도 권리가 이어지게 할지, 사고 때 누가 멈추고 복구하고 배상할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 기존 제도에 토큰 칸을 하나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미래 금융이 달릴 선로의 규격부터 정하는 일이다. 표준을 정하는 사람은 단어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어떤 자산이 들어올 수 있고, 누구와 연결되며, 어디에서 멈출지를 결정한다. 증권만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선로를 먼저 깔면 부동산과 예금, 에너지와 탄소에 얽힌 권리는 또 다른 선로를 요구하게 된다. 처음부터 여러 자산이 함께 달릴 공통 규격을 만들면 증권은 그 위에서 가장 먼저 제도화되는 화물이 될 수 있다. 판별법은 간단하다. 토큰을 걷어냈을 때 기관의 업무 순서와 장부 대사가 그대로 남는다면 바뀐 것은 증권의 표기 방식뿐이다. 자산과 돈, 이전 조건과 사고 책임이 한 거래 구조 안에서 함께 움직여야 금융의 선로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증권형 토큰’이 ‘토큰증권’보다 중요한 이유는 번역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기존의 증권을 토큰에도 추가적으로 덧붙이는게 아니라, 블록체인이라는 세계 공통의 레일 위에 마찰없이 돌아다니는 토큰이라는 그릇을 활용하여 모든 금융을 다시 설계한다는 미래지향적 비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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