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피엔스를 처음 읽었을 때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사람은 눈앞에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있고, 그 상상을 여럿이 같이 믿으면 동물이 못 하는 일을 해낸다는 것이었음.
서로 얼굴을 알고 뒷담화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무리는 150명 정도가 한계라고 함. 이 정도 규모의 협동은 침팬지 같은 동물도 함.
그런데 호모 사피엔스는 이 선을 넘었음. 평생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수만 명이 같은 신을 믿고, 같은 왕을 섬기고, 같은 돈을 받아주면서 도시가 됐고 제국이 된 거임.
처음엔 애니미즘이었고 그다음엔 신화와 종교였고.. 지금은 돈, 자본주의, 국가, 법임. 수십억 명이 이걸 믿으면서 대충 같은 방향을 보고 살아가고 있음.
지폐 한 장에 가치가 있다는 건 물리 법칙이 정한 게 아니라 그냥 모두가 믿으니까 작동하는 거처럼.. 다들 그 종이를 한 장이라도 더 모으려고 인생을 갈아넣고 있는거 처럼..
2/ 법은 뭘 지키는 상상인가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하나의 같은 방향으로 일하게 됐고, 옛날 소규모 사회와는 비교가 안 되는 양의 생산물이 나왔음. 더 많은 주체들이 협력할수록.
문제는 그다음이었음. 그렇게 다같이 협력한 생산물을 어떻게 놔눠서, 누가 얼마나 가져가고, 내 것을 어떻게 지키느냐.
오랫동안 이 질문의 답은 사람이었음. 왕이 정하고, 독재자가 정하고, 소수 엘리트가 정했음.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착취적 제도라고 부르는 게 이 구조임. 규칙을 정하는 사람이 그 규칙으로 제일 많이 얻는 구조.
이런 곳에서 일반 사람들은는 열심히 일할 이유가 없음. 어차피 뺏길 거니까. 그래서 사회 전체가 가난해짐.
경제학자 더글러스 노스는 제도를 게임의 규칙이라고 했음. 축구로 치면 골대 위치와 반칙 기준과 같은 것임.
이 관점에서 법은.. 누가 얼만큼 가져갈 것인지,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를 미리 정해두고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만인들이 똑같이 적용 받게 만드는, 공정의 도구가 됨.
규칙이 미리 정해지고 모두에게 보여야, 그제서야 사람들은 내 몫을 안 뺏길 거라 믿고 시간과 돈을 넣을 수 있는 거임.
3/ 함무라비와 1776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는 두 문서를 나란히 놓았음. 기원전 1776년쯤의 함무라비 법전, 그리고 서기 1776년의 미국 독립선언문.
- 함무라비 법전은 평등의 문서가 아니었음.
귀족이 다른 귀족의 눈을 멀게 하면 그 사람 눈도 멀게 했음. 그런데 평민의 눈이었으면 은 60세겔만 내면 됐고, 노예의 눈이었으면 노예 값의 절반만 물어주면 끝이었음.
같은 눈인데 누구 눈이냐에 따라 값이 달랐던 거임. 그리고 법전은 이 차별이 신들이 정한 질서라고 못 박았음.
3,500년쯤 뒤 독립선언문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선언함. 하라리는 함무라비 법전도, 독립선언문도, 둘 다 상상의 산물이라고 봄. 차별도 평등도 자연에 새겨진 사실이 아니라, 사람들이 믿기로 한 이야기라는 것임.
그럼 함무라비의 의미는 뭐였을까. 규칙을 돌에 새겨서 공개했다는 점임.
불공평한 규칙이었지만, 왕의 그날 기분에 달려 있던 처벌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 됐음. 내가 이 행동을 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미리 알게 된 거임.
각 행동에 대한 예측이 가능해졌던거임.
- 3,500년 이후, 독립선언문은 평등을 선언했지만.. 처음부터 완전하지는 않았음.
1787년 헌법은 노예 한 명을 인구 계산에서 5분의 3명으로 셌고, 노예제 폐지는 1865년, 여성 투표권는 1920년, 인종 차별을 법으로 금지한 건 1964년임.
독립선언문에 평등이라는 기준이 먼저 생기고, 점점 세상은 그 방향대로 천천히 진화되었고, 그 규칙 아래에서 점점 만인들에게 공정해지는 방향으로 세상은 발전해왔던거임.
그래야 이 발전이 지속 가능하기 때문에..
4/ 크립토라는 작은 신화
- 믿건 말건, 크립토도 상상의 질서임. 비트코인에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돌아가는 네트워크니까.
그리고 여기엔 처음부터 강한 교리가 있었음.
'코드가 곧 법이다.'
국가를 믿지 않아도, 은행과 법원이 없어도 코드가 알아서 규칙을 집행할 거라는 믿음이었음.
중개자도, 왕도, 엘리트도 필요 없는 세계.
- ICO, 러그풀, 루나, FTX.
어떤 중개자도, 왕도, 규제도, 없었던 탈중앙 세상은 자유로웠지만, 그 자유를 제일 잘 사용한 건 정보와 물량을 먼저 쥔 쪽이었음.
유통 물량은 조금만 풀고 전체 가치는 높게 잡아 상장시킨 다음, 언락 때마다 개인한테 물량을 넘긴것도 자유.
상장 조건과 마켓메이킹 계약이 공개되지 않았던 것도 자유.
내부자가 먼저 알고 먼저 팔았던 것도 자유.
그 자유를 자신의 이익에 사용했던 것임.
왕 없는 세계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그 안에서 착취적 제도가 다른 쪽으로 다시 자연스럽게 나타난 거임.
코인 시장에는 갑과 을이 있었음. 규칙을 정하는 쪽과 규칙을 모르는 쪽.
코드는 거래를 실행할 뿐, 누가 정보를 먼저 가졌는지는 따지지 않으니까 이 구조를 막을 방법이 없었음.
5/ 클래리티가 하려는 것
클래리티 법안은 2025년 7월 하원을 294 대 134로 통과했고, 2026년 5월 상원 은행위원회를 15 대 9로 넘었음. 7월에 상원 통합안이 나왔고, 9월 15일 상원 절차 표결이 잡혀 있음. 아직 법이 된 건 아님.
내용은 크게 두 갈래임.
하나는 누가 감독할지 정하는 것.
어떤 토큰은 주식처럼 보고 SEC가 맡고, 어떤 토큰은 원자재처럼 보고 CFTC가 맡는 기준을 법에 적는 거임. 지금까지 이 경계는 소송이 걸릴 때마다 그때그때 정해졌음.
다른 하나는 정보를 공개하게 하는 것.
토큰을 만든 쪽이 정보를 공개하고 인증받게 하고, 거래소와 브로커를 등록하게 하고, 거래소가 파산해도 고객 자산은 따로 보호받게 하는 거임.
사피엔스 프레임으로 보면 작은 신화가 큰 신화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임.
코드가 법이라던 시장이 이제 국가의 법이 정한 칸 안에서 스스로를 설명하겠다는 거니까.
탈중앙을 외치던 시장이 국가의 인정을 구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지만, 함무라비를 떠올리면 순서상 자연스럽기도 함.
이 토큰이 뭔지, 누가 감독하는지, 발행자가 뭘 공개해야 하는지를 문장으로 적어서 공개하는 것. 그래서 누구든 같은 규칙을 적용받고, 내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예측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리고 문제가 되지 않는 영역은 얼마든지 발전시켜서 각자의 유익에 쓰는 것.
그게 클래리티가 하려는 것임.
6/ 1787년의 헌법처럼
함무라비 법전은 불평등했지만 규칙을 돌에 새겼음. 1787년 헌법은 평등을 지키지 못했지만 그 약속을 따라잡을 수 있는 틀이 됐음. 수정헌법이 하나씩 붙으면서 선언과 현실의 간격이 조금씩 줄었음.
클래리티도 그런 첫 문서에 가까울 거라 봄. 통과되더라도 첫 버전엔 분명 구멍이 있을 것임.
다만 구멍을 지적할 기준이 생긴다는 게 중요함. 지금까지 코인판의 불공정은 호소할 데가 없었음. 규칙이 없으니 규칙을 어긴 사람도 없었으니까. 규칙이 적히면 그제서야 어겼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거임.
열심히 농사 지어놨는데 왕이 지나가면서 다 걷어가는 일이 없어지면, 사람들은 자기 권리 안에서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거임.
상상의 질서는 모두가 믿을 때 작동함. 그런데 그 질서가 누구에게 유리한지는, 믿는 사람들이 계속 따져볼 때만 바뀌어 왔음.
크립토는 이제 더 큰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음. 그 안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지는 법이 통과된 다음부터 정해질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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