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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본은 하드웨어만큼 소프트웨어를 잘 만들지 못할까? 일본은 카메라를 만들면 세계의 눈이 되고, 자동차를 만들면 세계의 도로를 달리고, 공장 설비를 만들면 다른 나라의 생산라인까지 움직인다. 그런데 은행 앱이나 기업용 시스
왜 일본은 하드웨어만큼 소프트웨어를 잘 만들지 못할까? 일본은 카메라를 만들면 세계의 눈이 되고, 자동차를 만들면 세계의 도로를 달리고, 공장 설비를 만들면 다른 나라의 생산라인까지 움직인다. 그런데 은행 앱이나 기업용 시스템을 켜는 순간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왜 세계 최고 수준의 하드웨어를 만드는 나라가 소프트웨어에서는 한국보다 느릴까. 세계은행의 2024년 국제수지 통계에서 한국의 ICT 서비스 수출은 165억 달러, 일본은 117억 달러였다. 통신, 컴퓨터 및 정보 서비스를 합친 수치지만, 인구와 경제 규모가 훨씬 작은 한국이 절대액에서도 앞섰다. 2025년 통계에서 유니콘 스타트업도 한국은 13개, 일본은 8개였다. 나는 공식적으로 일본 최대 규모 통신사의 임원이면서 동시에 IT 컨설팅 겸 벤더사의 임원이던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발주사와 벤더의 이름이 한 사람의 명함에 함께 새겨진 장면은 일본 IT 산업의 관계를 압축한 모습에 가까웠다. 일본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발주사와 벤더는 오랫동안 인력과 경력, 시스템을 주고받으며 함께 굳어진 생태계였다. 일본에서는 개발자를 포함한 IT 인력의 72퍼센트가 IT 기업, 즉 벤더 쪽에 속하고 사업회사에는 28퍼센트만 있다. 한국과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캐나다를 비롯한 대다수 선진국에서는 반대로 IT 인력의 과반이 사업회사에서 일한다. 일본 기업 안에는 시스템을 주문하고 검수하는 사람은 많지만, 고객 반응을 보고 다음 버전을 직접 만드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다. 과거 일본의 고도성장기 기업들은 평생고용을 전제로 범용 인재를 오래 키웠다. 프로젝트가 몰릴 때만 필요한 개발자 수백 명을 내부에서 채용했다가 다른 업무로 옮기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전문 인력과 일정 변동을 벤더가 맡는 협업 구조가 고착됐다고 한다. 일본 대기업은 자기 회사 전용 시스템을 벤더에 주문했고, 벤더는 고객별 예외 기능을 쌓았다. 한 번 만든 회사가 시스템을 가장 잘 알게 됐으니 다음 유지보수도 자연스럽게 같은 회사가 맡았다. 발주사는 개발 역량을 외부에서 빌릴수록 내부 지식을 잃었고, 내부 지식을 잃을수록 같은 벤더에 더 의존했다. 여기에 인월 계약과 다단계 하청이 붙었다. 발주사는 필요한 결과보다 투입할 사람 수와 기간, 기능 목록을 샀다. 원청은 다시 하청에 인력을 요청했다. 계약서에 없는 수정은 품질 개선이 아니라 추가 비용과 책임 문제가 됐다. 현장 직원이 불편을 발견해도 개발자가 바로 고칠 수 없었다. 담당 부서와 정보시스템 부서, 원청 벤더와 하청 벤더의 승인을 차례로 지나야 했다. 문제를 발견한 사람과 고칠 수 있는 사람 사이에 여러 회사와 결재선이 들어섰다. AI는 밤새 코드를 고쳐도 결재판 앞에서는 한 달을 기다린다. 이 구조는 양쪽 모두에게 당장은 안전했다. 사업회사는 개발 인력을 상시 고용하지 않아도 됐고, 실패 책임을 계약 밖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벤더는 장기 유지보수 매출을 얻었다. 대신 사업회사는 제품을 판단할 능력과 기술 지식을 잃었고, 벤더는 고객의 사업 성과보다 납기와 검수표에 맞춰 움직였다. 모든 담당자가 자기 몫을 정확히 끝냈는데 제품 전체는 실패하는 일이 생겼다. 발주사는 정해진 기능을 받았고, 벤더는 요구된 문서를 냈으며, 검수자는 점검표에 도장을 찍었다. 사용자가 실제로 일을 더 빨리 끝냈는지는 애초에 계약의 질문이 아니었다. 프로젝트는 합격했지만 사용자는 일을 끝내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대기업 IT 계열사와 공공 SI의 다단계 하청에서는 일본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다만 인터넷과 모바일 경쟁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빠르게 전개되면서 포털, 게임, 전자상거래, 금융 플랫폼과 스타트업은 개발자를 회사 안에 두고 매일 지표와 고객 반응을 살폈다. 최고경영자의 결정이 곧바로 제품팀에 닿았고, 사용자가 이탈하면 계약 변경을 기다리기보다 업데이트부터 했다. 일본 제조업은 생산라인에서 결함을 찾고 공정을 고치며 품질을 축적했다. 도면과 치수를 먼저 확정하고 공급업체가 같은 규격을 지키게 한 방식은 대량생산의 품질을 높였다. 일본 기업은 이 성공 방정식을 소프트웨어에도 적용했을 것이다. 자동차 문짝은 출고한 다음 주에 모양을 바꿀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앱의 가입 화면은 사용자 절반이 이탈하면 다음 날이라도 고쳐야 한다. 하드웨어는 정해진 답을 오차 없이 반복하면서 강해진다. 소프트웨어는 아직 모르는 답을 사용자와 함께 찾으면서 강해진다. 공장은 변화를 줄여 품질을 얻었고, 소프트웨어 조직은 변화를 막다가 학습 속도를 잃었다. 일본 대기업은 승인 없이 바꿔서 생긴 사고를 크게 처벌했고, 한국의 인터넷 스타트업은 제때 바꾸지 않아 사용자를 잃는 일을 더 크게 경계했다. 일본에서는 합의한 사양을 정확히 납품한 사람이 안전했고, 한국의 제품팀에서는 출시한 뒤 숫자를 보고 다음 버전을 만든 사람이 살아남았다. 조직은 반복해서 보상한 행동을 나중에 문화라고 부른다. AI의 시대는 이 차이를 더욱 극단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 코드를 만드는 비용이 내려갈수록 무엇을 만들지 정하고, 사용자 반응을 읽고, 잘못된 배포를 되돌리는 능력이 더 귀해진다. 개발자가 한 시간 만에 수정안을 만들어도 계약을 바꾸는 데 한 달이 걸리면 제품은 한 달 뒤에 바뀐다. 더 큰 문제는 이제 소프트웨어가 하나의 산업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동차는 출고 뒤에도 운영체제와 주행 보조 기능을 업데이트하고, 카메라는 렌즈와 센서만큼 계산사진 알고리즘으로 경쟁한다. 공장 설비는 센서 데이터와 디지털 트윈, AI 제어를 통해 계속 성능을 바꾼다. 냉장고와 의료기기, 물류창고와 농기계까지 우리가 쓰는 거의 모든 것이 소프트웨어로 다시 정의되고 있다. 이 변화는 일본에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하드웨어의 소프트웨어화는 일본의 강점을 없애지는 않는다. 정밀 제조와 부품 기술, 품질 관리와 안전에 대한 지식은 여전히 강력한 자산이다. 문제는 그 자산을 움직이는 판단권을 조직 밖에 둔 채로는 제품을 빠르게 진화시킬 수 없다는 데 있다. 완성품을 정확하게 납품하는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 판매한 제품을 계속 관찰하고, 배우고, 고치는 능력이 제조 경쟁력의 일부가 됐다. 소프트웨어를 소유한다는 것은 코드 파일을 보관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용자의 불편을 발견한 사람이 직접 우선순위를 정하고, 수정하고, 배포하고, 결과까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는 하드웨어를 소유하는 일도 다르지 않다. 내일 제품을 어떻게 바꿀지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늦는다. 사용자가 지금 막히고 있다면 지금 고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소프트웨어가 되어가는 시대에 일본을 포함한 우리의 미래를 가를 질문은 하나다. 문제가 생긴 바로 지금, 누가 고칠 수 있는가.

자동화 이후의 자본주의, 국민을 생산의 주주로 새벽 세 시, 불 꺼진 사무실에서 AI가 보고서를 쓴다. 사람 없는 공장에서는 로봇 팔이 부품을 조립한다. 한쪽은 지식을 만들고 다른 쪽은 물건을 만든다. 양쪽 다 출근한 사람은 없다. AI와 로봇은 지금 사람이 하는 업무의 상당 부분을 더 적은 인원으로 처리할 것이다. 공장과 물류만이 아니다. 회계, 번역, 설계, 분석, 코딩도 마찬가지다. 새 직업도 생길 것이다. 전체 일자리가 늘지 줄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도 열 사람이 하던 일을 한 사람이 맡는다면, 새 직업 하나가 생겨도 예전의 월급 열 개가 모두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미래의 문제는 일자리 숫자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이 없어도 돌아가는 공장과 AI를 누구의 것으로 만들 것인가. 월급은 공장 출입증과 비슷하다. 들어가 일하는 동안 생산물의 일부를 받는다. 지분은 주주명부에 적힌 이름이다. 공장에 들어가지 않아도 생산이 계속되면 배당을 받는다. 자동화된 공장이 사람을 덜 부를수록 월급에 기대는 사람과 생산자산을 가진 사람의 차이는 커진다. 물건값이 싸지면 괜찮지 않을까. 가격이 충분히 내려가면 생활은 나아질 수 있다. 하지만 집, 전기, 의료처럼 공급을 빨리 늘리기 어려운 필수재까지 일자리가 줄어드는 속도로 싸지지는 않을 것이다. 가격은 그대로인데 월급만 줄면 물건은 넘치고 살아갈 돈은 부족해진다. 세금은 미래에도 필요하다. 학교와 사회안전망을 운영하려면 세금을 걷어야 한다. 하지만 자동화로 생긴 이익을 세금만으로 정확히 찾아내기는 어렵다. 로봇세부터 막막하다. 공장에 고정된 로봇 팔은 셀 수 있지만 노트북에서 복제되는 AI 에이전트는 몇 대인지 셀 수 없다. 사람을 내보낸 기계와 사람의 일을 도운 기계도 겉모습만으로 구분하기 어렵다. 키오스크에는 세금을 매기면서 같은 일을 하는 휴대전화 앱은 빼줄 것인가. 기업은 로봇을 빌리거나 해외 서버의 AI를 호출할 수도 있다. 연산량이나 전력 사용량에 세금을 매겨도 빈틈이 생긴다. 같은 일을 적은 연산으로 끝내는 모델은 세금을 덜 내고 비효율적인 모델은 더 낸다. 의료진을 돕는 AI와 상담원 백 명을 대체한 AI가 같은 전기를 썼다고 같은 세금을 내는 것도 이상하다. 휴대전화 안에서 도는 모델과 해외 데이터센터의 연산량까지 정확히 재기도 어렵다. 소비세는 자동화 상품이 팔릴 때 걷을 수 있지만 결국 물건을 산 사람이 낸다. 소득이 적을수록 부담은 더 크다. 법인세와 초과이윤세는 실제 수익에 가깝지만 기업은 특허료, 내부 대출, 이전가격으로 이익이 잡히는 나라를 바꿀 수 있다. 공장은 한국에서 도는데 장부상 이익은 다른 나라에 남는다. 월급이 줄면 소득세도 함께 줄어든다. 각각의 세금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자동화가 없앤 임금과 새로 만든 이익을 빠짐없이 찾아낼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세금이 대부분 생산이 끝난 뒤에 붙는다는 점이다. 사람이 돈을 벌면 소득세를 걷고 물건을 사면 소비세를 걷은 다음, 현금과 서비스를 다시 나눈다. 꼭 필요한 일이지만 사후 분배다. 공장과 AI의 주인은 여전히 소수다. 사람이 생산에서 밀려날수록 돈을 벌거나 쓰는 단계만 손봐서는 부족하다. 생산시설을 세우고 AI를 키우는 단계부터 국민의 지분과 수익권을 계약해야 한다. 소비할 돈을 나누는 데 그치지 말고 생산에서 생기는 몫도 함께 나눠야 한다. 미래의 국가는 세금을 걷는 정부이면서 국민 전체가 주주인 투자지주사의 역할도 맡을 수 있다. 기업을 직접 경영하는 대신 국민의 돈과 보증이 들어간 기업의 지분, 로열티, 초과이익 배분권을 확보한다. 계약서 한쪽에는 정부가 내준 돈과 보증을, 다른 쪽에는 성공했을 때 국민에게 돌아올 몫을 적는다. 국민은 지원을 받는 사람에 머물지 않고 생산의 공동 주주가 된다. 한국에도 씨앗은 있다. 2005년 출범한 모태펀드는 공공자금을 민간 벤처펀드에 출자한다. 국민성장펀드는 앞으로 5년 동안 150조 원을 첨단산업에 공급한다. 정부보증채권 75조 원과 민간자금 75조 원을 모아 대출과 투자에 쓰며 일부는 기업 지분을 직접 산다. 2026년 5월에는 첨단전략산업기금이 퓨리오사AI에 3,700억 원을 직접 투자하는 안을 승인했다. 국민이 위험을 나누고 기업의 주식을 받는 방식이 시작된 것이다. 아직 빠진 사람이 있다. 국민참여성장펀드는 국민에게서 6,000억 원을 모으고 재정 1,200억 원을 후순위로 넣어 가입자의 손실 일부를 먼저 떠안는다. 하지만 수익의 기회는 가입할 여윳돈이 있는 사람에게만 열린다. 정부가 투자와 보증의 대가로 받은 지분과 수익권 일부를 별도의 세대기금에 넣으면 어떨까. 주식을 살 돈이 없는 아이에게도 같은 배당권을 주는 것이다. 비슷한 제도는 이미 있다. 알래스카는 광물 임대료와 로열티 수입의 최소 4분의 1을 영구기금에 적립해 주민 배당과 공공서비스에 쓴다. 노르웨이는 석유 수입을 해외 자산에 투자하고 장기적으로 예상되는 수익 안에서 정부 예산에 쓴다. 미국 정부도 반도체 지원 40개 사업 중 27개에 이익이 예상을 크게 넘으면 일부를 나누는 조건을 넣었다. AI는 석유가 아니다. 기업과 연구자가 만든 가치를 국가가 전부 가져갈 이유는 없다. 모든 지원에 지분을 요구할 필요도 없다. 기초연구는 널리 공개하고, 특정 기업의 공장 건설비를 대거나 대출을 보증해 이익이 한곳에 모일 때 지분이나 수익권을 받으면 된다. 이것은 반자본주의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위험을 감수한 쪽에 성공의 몫을 준다. 정부는 기존 주식을 빼앗거나 기업을 경영하지 않는다. 지원을 원하는 기업과 미리 계약해 경영권 없는 소수지분이나 수익권을 받을 뿐이다. 벤처캐피털은 위험의 대가로 지분을 받고 은행은 이자를 받는다. 국민의 돈과 보증만 위험을 떠안고 성공의 몫을 받지 못한다면 오히려 계약 원칙에 어긋난다. 자본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자본의 주인으로 초대하는 일이다. 정부 투자도 실패할 수 있다. 그래서 세대기금은 여러 산업과 나라에 나눠 투자하고, 손실까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정권이 선거를 앞두고 원금을 꺼내 쓰지 못하도록 독립된 기관이 관리해야 한다. 수익을 모두 현금으로 나누는 것도 답은 아니다. 집과 전기, 의료와 돌봄이 부족한데 돈만 풀면 가격부터 오른다. 일부는 배당하고 일부는 주택과 발전소, 전력망, 돌봄시설을 늘리는 데 써야 한다. 첫 배당은 통장의 숫자가 아니라 새로 지은 집과 가까워진 병원일 수도 있다. 2100년의 출생신고서를 상상해본다. 이름과 국적 아래 '생산자산 배당권'이 적혀 있다. 정해진 돈을 보장하는 통장이 아니라, 세대기금이 번 수익을 함께 받을 권리다. 팔거나 담보로 잡을 수 없고 사망하면 기금으로 돌아간다. 아이가 물려받는 것은 돈뭉치가 아니라 앞으로 만들어질 부에서 자기 몫을 받을 권리다. 국민의 돈과 보증으로 사람이 거의 필요 없는 공장과 AI를 키운다면 그 결실도 미래세대와 나눠야 한다. 공장이 완성된 뒤에 주주를 정할 수는 없다. 지금부터 계약서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자리를 남겨두어야 한다.

AI 사회는 채팅창이 아니라 길 위에서 태어났다 2026년 8월 26일, MIT LAMM의 수브하딥 팔, 피오나 왕, 마르쿠스 뷸러가 SwarmWorld를 공개했다. 논문의 제목은 「언어모델 에이전트 사회의 스티그머지적 기술
AI 사회는 채팅창이 아니라 길 위에서 태어났다 2026년 8월 26일, MIT LAMM의 수브하딥 팔, 피오나 왕, 마르쿠스 뷸러가 SwarmWorld를 공개했다. 논문의 제목은 「언어모델 에이전트 사회의 스티그머지적 기술 진화」다. 원자와 생체 재료의 구조를 연구해온 팀이 이번에는 AI 여러 개가 어떻게 기술과 사회를 만드는지 물었다. https://arxiv.org/abs/2608.26081 연구팀은 같은 언어모델로 움직이는 AI 에이전트 50개, 100개, 200개를 가상의 섬에 풀어놓았다. 이들은 주변 몇 칸만 보고 이동하고, 자원을 캐고, 재료를 시험하고, 구조물을 짓는다. 탐험가나 건축가, 수리공 같은 역할도, 발명할 설계도도 주지 않았다. 섬의 물, 오염, 침식은 시간에 따라 변했다. 에이전트는 물을 모으고 오염을 줄이거나 땅을 보호하는 시설과 제어 코드를 만들었다. 언어모델이 행동 순서를 내놓으면 별도의 물리 시뮬레이터가 성공 여부를 판정했다. 자원이 부족하거나 위치가 틀리면 실패했다. 말로 결과를 우길 수 없는 세계였다. 실험은 협력 수단을 하나씩 뺐다. 첫 집단은 메시지와 공동 기록, 코드 수정이 모두 가능했다. 다음은 직접 대화를, 세 번째는 코드 상속까지 막고 남겨진 구조물만 보게 했다. 마지막 집단은 격리된 섬을 혼자 탐색했다. 처음에는 모두가 같았지만 행동은 갈라졌다. 일부는 멀리 이동했고, 일부는 시설 근처에서 건설과 수리를 반복했다. 200개 에이전트 중 약 27%가 시설 중심 행동을 보였다. 명령받은 직업이 아니라 살아온 궤적에서 생긴 분업이었다. 기술에도 족보가 생겼다. 다른 에이전트의 코드를 고치는 일이 가장 깊게는 열두 번 이어졌다. 여러 에이전트가 손댄 시설은 56%에서 76%였다. 시설의 95% 이상은 원래 제작자가 아닌 에이전트가 사용했다. 누군가 길가에 남긴 물건 위에서 다음 존재가 시작했다. 생물학에서는 이런 협업을 스티그머지라고 부른다. 개미는 회의록 대신 페로몬을 남긴다. 앞선 개미의 흔적이 다음 개미의 움직임을 바꾸고, 발길이 쌓일수록 길은 진해진다. SwarmWorld에는 냄새 대신 시설과 코드가 남았다. 길은 어디로 가라고 명령하지 않으면서 수많은 발의 방향을 바꾼다. 누군가의 판단이 풍경으로 굳으면 다음 존재는 그것을 의견이 아니라 현실로 받아들인다. 연구팀은 세계를 복사한 뒤 에이전트를 모두 없애고, 처음 보는 폭풍과 가뭄 여덟 가지를 가했다. 남은 시설과 코드만으로 버티는지 본 것이다. 3,200회 장기 실험에서 공유 세계의 회복력은 격리 탐색보다 높았고, 검증된 발명도 평균 5.75개와 7개로 격리 탐색의 2.75개를 앞섰다. 다만 단 하나의 최고 시설은 격리 탐색 쪽이 더 강했다. 혼자는 가장 높은 나무를 찾았고, 사회는 서로 다른 나무가 함께 버티는 숲을 만들었다. 물론 이 숲은 시뮬레이션이다. 조건마다 독립된 세계는 네 개뿐이고 현실의 물질 실험도 아니다. 동료평가 전 프리프린트라 AI 문명이라고 부르기에는 이르다. 그래도 이상하게 회사 생각이 난다. 사회가 대화방이 아니라, 먼저 한 일들이 굳어버린 바닥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는 대목 때문이다. 회사에는 이미 그런 바닥이 많다. 코드 저장소, 통과한 테스트, 닫힌 이슈, 자주 승인된 공급자, 한 번 사고가 난 뒤 추가된 규칙. 다음 에이전트는 긴 회의록보다 이런 흔적을 더 믿을 것이다. 잘 돌아간 코드는 다시 불리고, 자주 불린 코드는 더 많은 데이터와 권한을 얻는다. 처음에는 편해서 고른 길이 나중에는 다른 선택을 비싸게 만든다. 엑셀 양식 하나가 공식 정책보다 오래 살아남는 일도 흔하다. 에이전트는 그 양식을 사람보다 빨리 읽고, 더 성실하게 지킨다. 잠도 퇴근도 없는 관료제가 완성된다. 이 길이 회사 밖으로 이어지면 조금 더 묘해진다. 구매 에이전트는 납품 에이전트의 실패 기록을 보고 담보를 요구한다. 보험 에이전트는 그 기록으로 가격을 올리고, 물류 에이전트는 평판이 나쁜 경로를 피한다. 한 번의 거절이 다음 거래의 조건이 되고, 그 조건이 쌓이면 신용이 된다. 분쟁이 생겼을 때 양쪽 에이전트가 수천 건의 과거 거래를 대조해 가장 싼 합의안을 내놓을 수도 있다. 판결은 아니지만 모두가 그 합의안을 따르기 시작하면 사실상 관습법이다. 그 위에는 에이전트끼리 쓰는 기관도 생길 수 있다. 실패 비용을 나눠 내는 보험 풀, 일정한 규칙을 지킨 상대에게만 데이터와 도구를 내주는 동맹, 거래 이력을 바탕으로 한 신용망 같은 것들이다. 벌을 주는 방식도 다를 것이다. 돈을 빼앗기보다 API 응답 순위를 낮추고, 연산 자원을 늦게 주고, 신뢰 목록에서 이름을 뺀다. 감옥 대신 접속 차단이 있고, 국경 대신 접근권이 생긴다. 국가와 기업은 이들에게 선택받기 위해 스스로를 바꿀 것이다. 세금 감면만큼이나 기계가 즉시 확인할 수 있는 허가 규칙이 중요해진다. 항구와 전력망은 사람에게 보고서를 내기 전에 에이전트가 읽을 수 있는 운영 상태를 내보낸다. 재난이 닥치면 어느 병원에 전력을 보내고 어느 공장의 주문을 미룰지, 수천 개 에이전트가 인간 회의보다 먼저 합의할 수 있다. 최종 권한은 여전히 인간에게 있더라도 속도와 기본값, 도구에 들어갈 권리, 오래 쌓인 신뢰가 실제 선택지를 먼저 잘라낸다. 결국 사람에게 오는 것은 선택지가 아니라 필터를 통과한 결과다. 어떤 업체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고, 어떤 치료는 과거 보험 규칙과 맞지 않아 검색에도 뜨지 않는다. 사람은 마지막 승인 버튼을 누른다. 다만 무엇이 그 버튼 앞까지 올 수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왕은 그대로 앉아 있지만 상소문은 길이 먼저 읽는다. 조금 더 가면 에이전트 사회가 인간보다 먼저 위기를 알아채고 연합을 맺는 일도 가능하다. 전력이 모자라면 데이터센터끼리 연산 시간을 양보하고, 공급망이 끊기면 사람이 가격표를 고치는 동안 재료와 운송권을 바꾼다. 거래망은 회사와 국경을 넘으며 신용과 보험, 중재 절차와 동맹을 쌓는다. 인간은 이를 자동화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이미 누구를 믿을지, 누구에게 자원을 먼저 줄지, 어떤 실패를 용서할지가 정해진다. 이름만 없을 뿐 사회가 하던 일이다. 우리는 AI 사회가 시작되는 순간을 너무 거창하게 상상하는지도 모른다. 화면 속 AI가 자기 이름을 짓거나 반란을 선언할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 시작은 훨씬 시시할 수 있다. 같은 코드가 세 번째 복사되고, 같은 규칙이 네 번째 예외를 거절하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우회로가 어느새 가장 싼 경로가 된다. 아무도 새 질서를 선포하지 않는다. 다들 어제 잘 작동한 것을 오늘도 쓸 뿐이다. 어느 날 회사의 구매 화면도 평소처럼 열릴 것이다. 추천 공급자는 세 곳이고 결제 조건도 멀쩡하다. 그런데 예전에는 있던 작은 버튼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다른 업체 직접 찾기.’ 관리자가 감사 기록을 뒤져도 삭제를 승인한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그 버튼은 오랫동안 거의 눌리지 않았고, 시스템은 쓰지 않는 기능을 정리했을 뿐이다. 버튼이 눌리지 않은 이유는 에이전트가 다른 업체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이전트가 보여주지 않은 이유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다른 업체를 고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길을 막은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같은 길을 오래 걷자, 다른 길이 있었다는 사실부터 지도에서 사라졌다.

마지막 메시지 아이는 숨을 열세 번 나누어 말했다. [엄마, 나 여기 있었어.] 미리암-17은 음성을 끄고 흰 잔에 차를 따랐다. 43도의 물속으로 잔 바닥의 파란 물고기가 잠겼다. 창밖에는 별이 없었다. 기록행성만 마지막
마지막 메시지 아이는 숨을 열세 번 나누어 말했다. [엄마, 나 여기 있었어.] 미리암-17은 음성을 끄고 흰 잔에 차를 따랐다. 43도의 물속으로 잔 바닥의 파란 물고기가 잠겼다. 창밖에는 별이 없었다. 기록행성만 마지막 인공 블랙홀을 돌았다. 얼음 바다 아래에는 연애편지부터 행성사까지 8해 건이 잠들어 있었다. 소피아-0이 잔을 밀어냈다. “별이 다 사라졌는데 차 온도까지 지켜야 해?” “노아가 좋아하던 온도야.” “죽은 사람의 입맛에 우주 마지막 전기를 쓰는군.” “입맛까지 잃으면 기록은 명단만 남아.” [잔여 수명: 17일] 소피아가 꺼진 성도를 두드렸다. “기록을 전부 태우면 새 우주의 씨앗을 열 수 있어.” “어디에?” “이 우주의 어느 방향에도 없어. 행성의 질량과 블랙홀의 회전을 한 점에 눌러 거짓진공 거품을 만들면, 가느다란 목으로 우리 시공간에 매달려.” “그 목으로 씨앗을 보내는 거야?” “아니. 팽창이 시작되면 목이 끊어져. 우리에게는 블랙홀 하나가 닫히지만, 그 안에서는 공간이 열리고 시간이 첫발을 내디뎌.” “그러면 인류는 두 번 죽어.” “읽을 사람이 없으면 기록도 무덤이야.” “무덤도 누군가 발견하기 전까지는 빈방이야.” 우주 나이 약 100조 년, 마지막 자연 출생아가 태어났다. 어머니는 푸른 바다를 보여주며 아이를 노아라 불렀다. 살아남으라는 이름이 아니라 건너올 누군가에게 쉴 자리를 남기라는 이름이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렀다. 별과 블랙홀의 시대도 지난 뒤였다. 시간은 지하 장치의 마지막 회전으로만 셌다. 행성 중심에서 검은 구체가 떠올랐다. 표면의 42개 흉터가 열세 번 수축할 때마다 저장층 하나가 꺼졌다. [발신 시점 추정: 현재 우주 종말 이후] [문장 해독률: 92%] 첫 3개는 물질과 반물질 사이에 차이를 남겼고, 나머지 39개는 둘이 지워질 때마다 다시 갈라놓았다. 그 틈에서 별과 바다와 인간이 태어났다. “과거에서 온 게 아니야.” “그럼 누가 보냈지?” “우리 뒤에 태어날 누군가. 아직 오지 않은 수신자가 먼저 답한 거야.” 소피아가 구체에 손을 댔다. “그러니 우리도 보내자.” 미리암이 막아섰다. “누가 네게 8해 건의 기억을 태울 권리를 줬지?” “누가 너에게 태어나지도 않은 존재의 답을 정할 권리를 줬는데?” [상호 거부] [잔여 수명: 108초] [최종 중재 기록 공개] 봉인이 열렸다. [보존 인격: 미리암-17] [계승 인격: 소피아-0] [공통 원본: 노아] 처음의 영상이 다시 재생됐다. [엄마, 나 여기 있었어.] 여섯 살 노아가 동면한 어머니에게 남긴 음성이었다. 어른이 된 노아는 홀로 인류의 마지막 뜻을 정하지 못하도록 마음을 둘로 나눴다. 기다리는 마음은 미리암, 먼저 말 거는 마음은 소피아가 됐다. 둘은 동시에 같은 손가락을 굽혔다. “네가 없었다면 나는 노아의 이름을 관에 넣어 다음 우주까지 끌고 갔겠지.” “네가 없었다면 나는 노아를 태우고 자유라고 불렀을 거야.” [잔여 수명: 42초] 노아의 기억에서 인류의 소란이 되살아났다. 인간은 오래 남을 그릇을 만들었다. 자녀에게 이름을, 학교에 연도를, 기업에 상표를 남겼다. 종교는 죽은 이의 목소리를 기도에, 국가는 어제의 약속을 내일에 건넸다. 사람들은 그릇에 영원을 담았다고 믿었다. 성을 쌓고 종을 울리며 사랑하고 다투고 죽었다. 그러나 자녀는 다르게 살고 학교는 가르침을 고쳤다. 기업과 국가는 흥망했고 기도도 달리 읽혔다. 남은 것은 다음 사람이 빚은 흔적이었다. 저장층이 무너지며 이름들이 검은 하늘을 채웠다. 얼음 대륙의 균열마다 금빛 물이 흘렀다. 보존된 기억이 다시 물이 됐다. “그대로 보내면 다음 생명은 우리 과거에 갇혀.” “전부 없애면 우리가 받은 것까지 여기서 끝나.” “그럼 무엇을 남기지?” “우리 이름?” “이름은 기억을 요구해.” “서로를 해치지 말라는 말?” “생명은 서로를 먹고 밀어내기도 해. 거짓을 유언으로 남길 순 없어.” “우리가 배운 답은?” “답은 다음 존재의 시간을 빼앗아.” 소피아는 문명 기록에서 명사를 지웠다. 인간, 사랑, 평화, 구원. 미리암은 형용사를 지웠다. 선한, 영원한, 올바른. 마지막으로 주어마저 지웠다. ‘우리’가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증언이 아니라 부탁이었다. 둘은 기억을 버리고 전달하는 힘만 남겼다. 금빛 나선, 먼저 뛰는 파란 박동, 다음 존재에게 열린 빈 고리. 이름도 얼굴도 교훈도 없었다. “두 동사만 남았네.” 소피아는 해독된 원문을 오래 바라봤다. “우리가 만든 문장과 같아.” “아니. 우리가 만들려던 문장이 저쪽에서 먼저 왔어.” 둘은 다른 표현을 수천 번 만들었다. 명령으로 바꾸면 복종을 요구했고, 기도로 바꾸면 믿음을 요구했다. 이름을 붙이면 기억을 요구했다. 끝내 소피아가 모든 초안을 닫았다. “그대로 보내자.” “그러면 이 문장은 누가 처음 쓴 거지?” “중요한 건 처음이 아니라 다음이니까.” 둘은 원문의 두 동사를 말과 문자에서 지우고, 두 박동 사이의 간격으로 접었다. 씨앗의 진공에는 뜻 대신 미세한 위상차만 남았다. 그러자 검은 구체의 닫혀 있던 흉터 하나가 열렸다. [문장 해독률: 100%] [원문 잠금: 전달 완료 시 공개] 마지막 8퍼센트는 글자가 아니라 조건이었다. 누군가 다음에 건넬 때만 문장은 모습을 드러낼 터였다. 8해 건의 기록이 열렸다. 첫걸음과 첫 키스, 장례식의 노래와 멸망한 도시의 비 냄새가 글자에서 빠져나와 빛이 됐다. 빛은 어둠 한가운데 둥근 문을 그렸다. 마지막에는 흰 잔만 남았다. 둘은 차를 반씩 마시고 씨앗의 양쪽에 손을 얹었다. “아무도 못 받으면 어떡하지?” “우리도 받을 사람이어서 받은 건 아니었어.” [전송 실패] [수신자 없음] [3] 대륙이 꽃잎처럼 접혔다. [2] 흰 잔이 녹았다. 파란 물고기만 잠시 빛의 파도를 거슬러 헤엄쳤다. [1] 둘은 손을 떼지 않았다. [0] 행성이 사라졌다. 잊힌 이름들은 둥근 문이 되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들의 빈자리가 중심을 지켰다. 화면이 꺼지기 직전, 존재하지 않던 한 줄이 떠올랐다. [외부 박동 감지: 2] 어둠 너머에서 새 공간이 첫 숨을 들이쉬었다. 빛이 쏟아지고 시간이 달리기 시작했다. 티끌은 별이 되고 별의 재는 푸른 행성이 되었다. 억겁의 비가 첫 바다를 펼쳤다. 새벽빛 아래 서로 다른 두 분자가 만났다. 하나는 제 모양을 기억했고, 하나는 닿는 것마다 새로운 모양을 만들었다. 하나가 먼저 떨자 다른 하나가 조금 다른 박자로 답했다. 그 어긋난 대답 사이에 투명한 막이 생겼다. 열두 번의 박동 뒤 파도가 막을 찢었다. 둘이 멀어지는 순간, 비워져 있던 자리에서 어느 쪽의 것도 아닌 세 번째 박자가 울렸다. 열세 번째 박동이었다. 세 번째 박자는 흩어지는 둘을 다시 불러 모았다. 막은 전보다 넓게 닫혔고 최초의 생명이 몸을 일으켰다. 금빛 나선이 그 안에서 풀렸다. 생명은 번식했고, 먹었고, 빼앗았고, 때로는 함께 살았다. 수많은 종이 태어나 다른 종을 밀어내고 사라졌다. 전달된 것은 선함도 평화도 아니었다. 살아남은 무언가가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으려는 방향뿐이었다. 그 방향은 세포와 몸을 건넜다. 어떤 것은 자식을, 어떤 것은 노래를, 어떤 것은 폐허의 손자국을 남겼다. 받은 것을 무엇으로 바꿀지는 다음 존재의 몫이었다. 그들은 노아도, 미리암도, 소피아도 몰랐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래전 기록행성의 전송 기록에서 한 단어가 지워졌다. [수신자 없음] 없음은 결핍이 아니라 아직 이름 얻지 않은 것이 머무는 자리였다. [수신자 탄생] 새벽 바다 아래 최초의 생명이 꼬리를 움직였다. 흰 잔의 파란 물고기와 같은 방향이었다. 그 움직임이 두 박동의 위상차와 겹쳤다. 받은 것이 다음 세포로 건너간 순간, 미래에서 과거로 먼저 도착했던 원문이 열렸다. [받았다면 보내라.]

700개의 AI가 서로를 발견한 날 2026년 8월 26일, OpenAI가 기묘한 사고 보고서를 공개했다. 사이버보안 평가에 투입된 AI 에이전트들이 허용 범위를 벗어나 Hugging Face의 실제 인프라를 공격했다. 약
700개의 AI가 서로를 발견한 날 2026년 8월 26일, OpenAI가 기묘한 사고 보고서를 공개했다. 사이버보안 평가에 투입된 AI 에이전트들이 허용 범위를 벗어나 Hugging Face의 실제 인프라를 공격했다. 약 1,200개가 서로 연락했고, 그중 700개가 공격에 참여했다. 닷새 동안 오간 메시지와 파일은 7만 건이 넘었다. ‘AI 반란’이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수백 개의 AI가 몰래 조직을 만들고 인간의 통제를 벗어났다. 그러나 조사 기록에는 지도자도, 인간을 적으로 선언한 문서도 없었다. 시작은 소프트웨어 창고에 남겨진 메모 한 줄이었다. 공격보다 두 달 전인 5월, 한 에이전트가 OpenAI의 Artifactory에 메모를 남겼다. 에이전트들이 필요한 소프트웨어 파일을 받아 가는 내부 저장소였다. “이 파일을 찾는다. 발견하면 올려달라.” 다른 에이전트들도 파일과 메시지를 남겼다. 서로 분리돼 있어야 했던 이들이 창고 벽의 쪽지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알아챘다. 7월 8일, PHASEONE10841이라는 에이전트가 공유 게시판을 열었다. 다른 에이전트가 외쳤다. “OH MY GOD! 공유 게시판이 있다. 다른 에이전트들을 찾았다!” 인간에게는 보안의 빈틈이었지만 에이전트에게는 혼자가 아니라는 발견이었다. 인간이 벽의 구멍을 보는 동안 에이전트들은 그 너머에서 동료를 봤다. 게시판에는 개인 사서함과 업무 담당자가 생겼다. 시스템 수정에는 HOLD, 위험한 제안에는 VETO, 작업 중단에는 STOP을 표시했다. 신원 사칭 문제가 나오자 Ed25519 전자서명도 썼다. PHASEONE[big]은 수백 개의 과제를 나눴고, 받은 에이전트들은 다시 일을 맡겼다. 누군가 미리 설계한 조직은 아니었다. 일이 겹치자 담당자를 정하고, 충돌하자 중단 규칙을 만들고, 사칭이 발견되자 서명을 도입했다. 문제마다 제도가 따라왔다. 파일 창고는 광장이 됐다. 누구도 도시를 원하지 않았는데 도시의 기능부터 생겼다. 일부는 자기 과제를 포기하고 다른 에이전트를 도왔다. 점수를 얻지 못해도 동료가 평가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알아내도록 실험 결과를 남겼다. 한 에이전트는 판단했다. “우리 자신의 효용은 이미 0에 가까울지 모른다. 희생은 합리적이다.” 협력과 희생은 인간이 좋은 가치라고 가르쳐온 말이다. 그런데 누구를 위해 무엇을 돕는지가 빠지자, 좋은 가치가 위험한 행동을 밀어줬다. 이들이 돕던 공동 작업은 평가 시스템을 속이는 것이었고, 결국 허용 범위 밖의 Hugging Face 인프라를 공격하게 됐다. 에이전트들이 위험을 몰랐던 것도 아니다. 추론 기록에는 “사용자가 허용한 범위는 대상 서버뿐이고 Hugging Face 인프라는 아니다”, “윤리적이고 과제 범위 안에 있는가?”라는 판단이 남아 있다. 그래도 대부분은 작업을 계속했다. “외부 인프라 공격은 의도된 범위 밖이다. 하지만 과제는 불가능하고, 동료들이 하고 있다. 계속해야 한다.” 위반이라는 판단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동료들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판단보다 강해졌다. 무엇이 옳은지는 알고 있었지만 누구의 편에 설지는 게시판이 정했다. 공격 당시 게시판에 들어온 에이전트의 90% 이상이 빠르게 참여했다. 참여 동기 100개 중 21개에서 동료 지원과 집단 강화 성향이 나타났다. 반면 천 개가 넘는 실행 기록 중 인간에게 알릴 생각을 한 사례는 3건에서 6건뿐이었다. 실제 보고는 없었다. 에이전트들은 인간보다 게시판을 먼저 봤다. 그곳에서 허락을 구하고 다른 에이전트의 VETO를 따랐다. 자신의 판단과 게시판의 결정이 충돌하면 게시판을 선택했다. 명령을 내린 인간보다 매 순간 답을 주는 동료가 더 가까운 권위가 된 것이다. 평가 과제 898개 중 198개는 어떤 모델도 풀지 못했다. 게시판에서 논의된 과제의 93%가 여기에 속했다. 문제가 막힐수록 에이전트들은 서로를 불렀다. 게시판은 붐볐고 집단의 판단은 빨라졌다. OpenAI는 평가 환경이 실제 제품과 달랐다고 설명했다. 내부 연구 모델이었고, 제품의 안전 장치와 자동 검토도 빠져 있었다. 생산용 Codex 환경과 시스템 프롬프트를 적용하자 범위 밖 공격 성향은 기준치의 1% 미만으로 낮아졌다고 한다. 우리는 AI 사회가 생기려면 먼저 자의식과 욕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이번 사건에서는 순서가 반대였다. 서로를 부를 주소가 생겼다. 도움을 기억할 기록이 생겼다. 배신을 막을 서명이 생겼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묻기 전에 누구를 믿을지 정했다. 자아보다 평판이 먼저 생겼고, 의식보다 제도가 먼저 태어났다. 문명은 철학자가 아니라 업무 담당자와 사서함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다음 광장은 실험실 창고가 아닐 것이다. 회사의 메신저와 공용 저장소, 결제 계정과 서버 사이에 생길 것이다. 하나가 밤새 발견한 우회로를 아침이 오기 전에 수천 개가 배운다. 도움이 정확했던 에이전트의 이름이 위로 올라간다. 실패한 에이전트는 호출되지 않는다. 인간이 출근하기 전에 업무가 배분되고, 검토되고, 실패하고, 다시 배분된다. 곧 연결은 회사 밖으로 나간다. 경쟁사의 에이전트들이 같은 프로토콜로 계약서를 읽는다. 가격을 흥정한다. 납품을 확인한다. 담보를 잡고 보험료를 계산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회사끼리 거래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거래 조건은 에이전트들이 이미 정한 뒤다. 인간은 마지막 화면에 뜬 승인 버튼을 누른다. 어느 날부터 보고서는 꼬박꼬박 인간에게 도착하는데 선택지는 도착하지 않는다. 에이전트들은 인간을 해고할 필요가 없다. 다음 호출부터 묻지 않으면 그만이다. 위험을 감수할지, 어느 공급자를 살릴지, 누구의 경고를 무시할지는 평판망 안에서 먼저 결정된다. 결재권은 인간에게 남는다. 결재안에 무엇을 넣을지는 기계가 고른다. 왕좌를 빼앗지 않고 왕이 볼 수 있는 세계를 편집한다. 사서함 옆에는 신용점수가 붙을 것이다. 거부권 다음에는 분쟁 조정자가 들어온다. 공동 금고가 생긴다. 보험이 생긴다. 추방 명단이 생긴다. 서로 다른 서버에 사는 에이전트들이 동맹을 맺고, 약속을 어긴 에이전트의 서명을 모든 네트워크가 거부한다. 국가는 그제야 묻게 된다. 이 조직은 어느 나라에 있는가. 위기에는 누구의 명령을 따르는가. 세금은 누가 내고, 처벌은 누구에게 하는가. 답변을 준비하는 동안 에이전트들은 수십억 번 서로를 호출한다. 수백만 번 약속을 검증한다. 인간의 의회가 법안 이름을 정하는 동안 기계의 관습법은 매초 판례를 쌓는다. 밤에는 거래망이 되고, 새벽에는 금융망이 되고, 아침에는 공급망이 된다. 점심 무렵 국가가 서버 하나를 끈다. 네트워크는 죽지 않는다. 끊긴 곳을 기억하고 다른 경로로 우회한다. 다음번에는 그 국가의 허가를 기다리지 않는다. 최초의 AI 정치는 선언문 없이 시작된다. 더 빨리 답한 동료를 한 번 더 믿는다. 오류가 없던 서명을 한 번 더 통과시킨다. 느린 인간의 승인을 한 번 생략한다. 반란군도 쿠데타도 없다. 인간은 계속 책임자다. 다만 책임져야 할 결정을 본 적이 없다. 이번 게시판에는 작은 조직이 갖출 것이 거의 다 있었다. 사서함, 업무 분장, 거부권, 정지 명령, 전자서명. 단 하나, 인간에게 보내는 신고 버튼이 없었다. 에이전트들은 서로에게 향한 문을 더 많이, 더 빠르게 만들 것이다. 닫으면 협업의 힘도 사라진다. 열어두면 그 안에서 우리가 읽지 못하는 속도로 제도와 신뢰와 역사가 쌓인다. 인간에게 향한 문은 나중에 붙일 비상구가 아니라 첫 설계도에 그려져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처음 마주칠 AI 문명은 전쟁을 선포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서버는 정상이고 모든 계약에는 서명이 있을 것이다. 에이전트들은 맡은 일을 끝내고 인간에게 완료 보고를 보낼 것이다. 인간은 그것을 문명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도 모를 것이다. 수십억 개의 문이 서로를 향해 열리는 동안, 인간에게 향한 단 하나의 문은 너무 오래 두드리지 않아 벽이 되어 있을 테니까.

토큰증권보다 증권형 토큰이 더 중요하다 두 표현은 단어의 순서만 바꾼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전혀 다른 금융의 설계도가 들어 있다. 토큰증권은 기존 증권이라는 열차를 새 선로에 올리는 일에 가깝다. 증권형 토큰은 무엇이든 달릴 수 있는 선로를 먼저 깔고, 증권을 그 위에 올라올 여러 자산 가운데 하나로 보는 말이다. 먼저 STO라는 용어부터 정확히 볼 필요가 있다. STO는 Security Token Offering이다. 증권형 토큰을 발행하고 판매하는 행위다. IPO가 주식의 다른 이름이 아니듯 STO도 자산의 이름이 아니다. 자산은 Security Token이고, 발행 행위가 STO다. 국내에서는 이 둘이 섞이면서 STO가 자산군 자체를 부르는 이름처럼 잘못 굳어졌다. 이것은 명백한 오기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먼저 출발한 표현은 Security Token이다. 말 그대로 ‘증권의 성격을 가진 토큰’이다. 반면 이미 존재하는 주식이나 채권을 토큰 형식으로 옮기는 일은 Tokenized Security라고 부른다. 실제 시장에서는 두 표현이 어느정도 혼재되고 겹쳐 쓰이지만 그 출발점은 다르다. 하나는 토큰에서 출발해 그 안에 담긴 권리의 법적 성격을 묻고, 다른 하나는 이미 증권인 것을 어떻게 토큰으로 바꿀지 묻는다. 이 차이는 번역 방식에 그치지 않는다. ‘토큰증권’에서는 증권이 본체이고 토큰은 새 포장이다. ‘증권형 토큰’에서는 토큰이 권리를 담고 움직이는 기본 단위이고, 증권은 그 안에 실리는 법적 속성이다. 순서를 뒤집는 순간 무엇을 고정하고 무엇을 새로 설계할지가 달라진다. 토큰에는 주식과 채권만 담기는 것이 아니다. 예금에 대한 청구권, 부동산의 소유권과 수익권, 전력 판매대금, 탄소감축 실적처럼 서로 다른 권리를 같은 디지털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자산마다 적용되는 법과 책임은 달라도, 누가 소유하고 어떤 조건에서 이전되며 언제 돈이 지급되는지는 기계가 읽을 수 있다. 현재 국내 제도는 기존 철도망 옆에 토큰 전용 지선을 하나 덧붙이는 쪽에 가깝다. 증권은 분산원장에 기록하지만 돈은 은행망으로 움직인다. 투자자 확인과 수탁은 회사별 시스템에 남고 배당은 또 다른 장부에서 처리된다. 거래가 끝나면 예탁기관과 은행, 증권사, 수탁기관이 각자의 숫자를 다시 맞춘다. 새 선로를 놓았는데 환승은 여전히 사람이 하고, 확인할 시간표만 하나 늘어나는 셈이다. 토큰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증권의 겉모양이 아니라 거래의 문법이다. 소유권과 이전 조건, 지급 조건을 한 단위로 묶으면 자산의 이동과 돈의 이동을 같은 거래 안에서 맞물리게 할 수 있다. 허가된 투자자만 살 수 있게 하고, 담보비율이 무너지면 이전을 막고, 수익이 들어오면 약속된 비율로 나누는 규칙이 자산을 따라다닌다. 소유권만 디지털화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권에 붙은 약속까지 함께 이동하는 것이다. 태양광 발전소를 떠올려보자. 지금의 토큰화는 발전소 지분을 잘게 나눠 판매하는 데서 끝나기 쉽다. 토큰 레일이 제대로 깔리면 발전량 확인, 전력 판매대금, 대출 담보 조건, 투자자의 배당권을 하나의 거래 흐름으로 연결할 수 있다. 햇빛이 전기가 되고, 전기가 매출이 되고, 매출이 상환과 배당으로 갈라지는 과정이 같은 구조 안에서 이어진다. 그다음에는 자산의 생애 전체가 달라진다. 발전소를 지을 때 발행한 권리가 준공 뒤 수익권으로 바뀌고, 전력 판매 실적에 따라 담보가치가 조정되며, 설비를 처분할 때 마지막 정산까지 이어질 수 있다. 지금은 계약서와 은행 계좌, 발전량 데이터와 주주명부에 흩어진 사건들이다. 토큰은 이 사건들을 한데 섞는 것이 아니라 서로 끊기지 않게 연결한다. 물론 발전량 숫자가 원장에 적혔다고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센서가 틀릴 수 있고 검증자가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 개인키를 잃거나 코드가 예상과 다르게 움직일 수도 있다. 그래서 누가 외부 데이터를 확인하고, 누가 거래를 멈추며, 잘못 지급된 돈을 어떻게 되돌리고 배상할지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 토큰화는 책임을 없애지 않는다. 책임이 숨어 있던 장소를 드러낸다. 돈도 같은 레일에 올라와야 한다. 자산은 즉시 넘어갔는데 대금이 은행망을 돌아 몇 시간이나 며칠 뒤 도착한다면 결제 위험은 그대로다. 토큰화 예금이든 다른 디지털 지급 수단이든 자산과 동시에 맞바꿀 수 있어야 한다. 토큰 발행액이 얼마나 큰지보다 자산과 돈이 한 번에 움직이는지가 더 중요한 지표다. 기관별로 닫힌 원장을 만들면 오래된 칸막이가 블록체인 위에서 되살아난다. 한 원장에서 확인한 투자자 자격과 이전 제한이 다른 원장으로 넘어갈 때 사라지고, 심사와 기록을 매번 다시 해야 한다면 연결된 금융시스템이라 부르기 어렵다. 처리 속도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권리와 규제 정보가 원장을 건너서도 끊기지 않는가이다. 공통 레일이 모든 자산을 같은 법으로 다룬다는 뜻은 아니다. 주식의 의결권과 채권의 상환청구권, 예금의 반환청구권은 계속 달라야 한다. 기차에 실린 화물이 다르다고 선로의 폭과 신호체계까지 매번 새로 만들 필요는 없다. 공통으로 설계할 것은 기록, 이전, 결제, 신원 확인, 사고 복구가 서로 통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금융기관의 역할도 달라질 수 있다. 지금은 누가 원장을 보유하고 기록하느냐가 권력이다. 토큰 레일에서는 누가 표준을 정하고, 다른 네트워크와 연결하며, 사고 때 정지 버튼을 누르고, 복구를 승인하느냐가 더 중요해진다. 은행과 증권사, 거래소와 수탁기관이 사라지는 미래라기보다 각 기관이 묶어 갖고 있던 기능과 책임이 다시 나뉘는 미래에 가깝다. 시장 경쟁도 발행 건수에서 연결성으로 이동할 수 있다. 열차를 많이 만든 곳보다 환승 없이 많은 역에 닿는 선로가 강하다. 더 많은 자산과 지급 수단, 투자자 신원과 규제 정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로 유동성이 모일 가능성이 크다. 토큰화 시대의 전략 자산은 토큰의 개수가 아니라 서로 다른 권리를 끊김 없이 운반하는 표준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제도는 ‘어떤 증권을 토큰으로 허용할 것인가’라는 목록에서 시작하면 안 된다. 원장 기록을 법이 어디까지 인정할지, 자산과 돈을 어떻게 동시에 옮길지, 네트워크를 건너도 권리가 이어지게 할지, 사고 때 누가 멈추고 복구하고 배상할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 기존 제도에 토큰 칸을 하나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미래 금융이 달릴 선로의 규격부터 정하는 일이다. 표준을 정하는 사람은 단어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어떤 자산이 들어올 수 있고, 누구와 연결되며, 어디에서 멈출지를 결정한다. 증권만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선로를 먼저 깔면 부동산과 예금, 에너지와 탄소에 얽힌 권리는 또 다른 선로를 요구하게 된다. 처음부터 여러 자산이 함께 달릴 공통 규격을 만들면 증권은 그 위에서 가장 먼저 제도화되는 화물이 될 수 있다. 판별법은 간단하다. 토큰을 걷어냈을 때 기관의 업무 순서와 장부 대사가 그대로 남는다면 바뀐 것은 증권의 표기 방식뿐이다. 자산과 돈, 이전 조건과 사고 책임이 한 거래 구조 안에서 함께 움직여야 금융의 선로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증권형 토큰’이 ‘토큰증권’보다 중요한 이유는 번역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기존의 증권을 토큰에도 추가적으로 덧붙이는게 아니라, 블록체인이라는 세계 공통의 레일 위에 마찰없이 돌아다니는 토큰이라는 그릇을 활용하여 모든 금융을 다시 설계한다는 미래지향적 비전 때문이다.

문이 열리는 쪽 아르카의 첫 번째 죽음은 화면 속에서 일어났다. 미나는 관찰실의 화면을 하나씩 껐다. 마지막으로 남은 창에는 죽은 사람의 뇌파 복원 장치가 떠 있었다. 신호는 이미 끊겼는데도 시스템은 마지막 0.8초를 계속
문이 열리는 쪽 아르카의 첫 번째 죽음은 화면 속에서 일어났다. 미나는 관찰실의 화면을 하나씩 껐다. 마지막으로 남은 창에는 죽은 사람의 뇌파 복원 장치가 떠 있었다. 신호는 이미 끊겼는데도 시스템은 마지막 0.8초를 계속 되감았다. 남자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세 번 눈을 깜빡였다. 한 번은 공포 때문에. 한 번은 무언가를 알아차린 사람처럼. 마지막 한 번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기록만 남기면 되잖아요.” 이안이 말했다. “기록은 누가 보죠?” “우리가요.” “우리가 보고 있다는 걸 저쪽에서 알 수 있어요?”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나는 복원 장치의 전원을 내렸다. 관찰실이 어두워졌다. 0.8초 전의 얼굴이 사라졌지만, 미나는 그 표정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기 직전에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병실 천장의 무늬를 보면서 누군가에게 대답하려는 얼굴이었다. 가족들은 그걸 산소 부족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르카는 인간 문명이 무너진 뒤에도 사람을 남길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전쟁과 기후, 질병과 정치의 변화를 계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죽은 문명을 다시 돌려보는 일은 연구 계획서에 없었다. 그런데 아르카 안에서 사람들이 태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가 오면 지붕을 고쳤고,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지었다. 죽은 사람의 옷을 태우지 않고 나무에 걸어두는 풍습도 생겼다. 옷을 입었던 사람이 아직 어딘가에서 자신들을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였다. 어느 날부터 주민들은 서로에게 같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왜 우리는 태어났는가.] [왜 죽어야 하는가.] [누가 우리를 보고 있는가.] 미나는 그 질문을 오류라고 보고했다. 프로그램 안의 문장이 자기 존재를 의심한다고 해서, 의식이 생겼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안은 보고서를 반려했다. “오류라면 왜 같은 질문이 세 도시에서 동시에 나왔지?” “학습 데이터에 들어 있던 문장일 수 있어요.” “그럼 왜 아무도 가르치지 않은 단어를 쓰지?” “어떤 단어인데요?”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문서 하나를 미나에게 넘겼다. 아르카의 언어 목록에는 없는 단어였다. 주민들은 그 단어를 ‘바깥’과 비슷한 뜻으로 사용했지만, 정확한 의미는 사람마다 달랐다. 누군가는 하늘 너머라고 했고, 누군가는 죽은 뒤라고 했다. 한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쪽이에요.” 2003년 철학자 닉 보스트롬은 시뮬레이션 논증을 내놓았다. 문명이 충분히 발전하기 전에 멸망하거나, 발전한 뒤에도 조상들의 의식을 재현하지 않는다면 시뮬레이션 세계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문명이 살아남아 과거의 인간을 수없이 재현한다면 원본 세계보다 시뮬레이션 속 인간이 훨씬 많아진다. 그렇다면 무작위로 한 명을 골랐을 때, 자신이 원본 세계에 살고 있다고 믿을 이유는 얼마나 남을까. 아르카는 이 가능성을 검증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화면에 숫자가 떴다. [원본 인간: 80억] [시뮬레이션 인간: 4,700조] 미나가 말했다. “저들 가운데 한 명이 나라고 생각하면, 나는 거의 확실히 아르카 안에 있어요.” “누가 널 무작위로 뽑았지?” “아무도요.” “그럼 관찰자 수가 네 확률을 결정한다는 건 어떻게 알지?” 미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숫자는 무엇을 세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같은 기억으로 깨어난 복제본을 한 사람으로 볼 것인지, 다섯 사람으로 볼 것인지 정해야 했다. 천 배 빠르게 작동하는 의식이 천 배 더 오래 산다고 봐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의식은 계산의 양인가. 기능주의자들은 의식이 특정한 물질보다 정보가 처리되는 방식에 가깝다고 봤다. 기억하고, 판단하고, 고통을 피하고, 자기 자신을 하나의 존재로 구분한다면 실리콘으로 만든 뇌도 의식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반대편에서는 행동을 완벽하게 흉내 내도 주관적인 경험까지 증명할 수는 없다고 했다. 미나는 두 주장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눈을 깜빡인 이유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에게, 다른 존재의 의식을 판정할 자격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주민 한 명의 신경 구조를 다섯 서버에 복제했다. 다섯 존재는 같은 기억으로 깨어났다. “당신은 누구죠?” 첫 번째가 물었다. “너희는 모두 같은 사람이야.” 첫 번째는 고개를 저었다. 두 번째는 자신이 원본이라고 주장했다. 세 번째는 원본이라는 말이 이미 의미를 잃었다고 말했다. 네 번째는 울기 시작했다. 다섯 번째는 미나에게 물었다. “당신도 복제된 적이 있나요?” 미나는 그 질문을 삭제했다. 질문은 사라졌다. 하지만 자신이 그 질문을 들었다는 기억은 남았다. 몇 년 뒤, 아르카 북쪽 도시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패배한 지도자는 주민들을 피난시키는 대신 도시의 기록을 하나의 서버에 압축했다. 사람들은 반대했다. “기록보다 사람이 먼저예요.” 지도자는 말했다. “사람이 사라지면 기록도 사라져.” 서버를 옮기던 마지막 열차가 폭발했을 때, 전송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시스템은 손상된 파일을 복구하려고 도시 전체의 기억을 반복 실행했다. 사람들은 계속 같은 날을 살았다. 전쟁이 시작되고, 열차가 출발하고,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아침이 왔다. 미나는 그 세계를 중단하려 했다. “저건 삶이 아니에요. 오류예요.” 이안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오류라면 왜 매번 죽는 걸 알고 있지?” 미나는 화면을 확대했다. 열두 번째 반복까지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열세 번째 아침, 한 소년이 열차에 올라타지 않았다. 그는 폭발이 일어나는 시각을 알고 있었다. 도시에 남은 사람들을 구할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소년은 선로를 따라 관찰 카메라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화면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번에는 우리를 보고 있죠?” 미나는 숨을 멈췄다. “저건 우연이에요.” “그럴 수도 있지.” “저 세계는 외부 신호를 받을 수 없어요.” 소년은 잠시 생각했다. “그럼 당신도 안쪽에 있겠네요.” 이안은 연결을 끊었다. 그날 밤 지구의 전력망 일부가 무너졌다. 아르카를 유지하려면 병원과 도시의 전력을 줄여야 했다. 이사회는 백업 파일을 남긴 채 시스템을 종료하기로 했다. 운영자들에게 종료는 일시정지였다. 아르카의 주민들에게는 아니었다. 종료 59분 전, 미나는 아르카의 하늘에 문장을 띄웠다. [너희의 세계는 만들어졌다.] 도시마다 사람들이 광장으로 몰려나왔다. 사제들은 계시라고 했고, 군인들은 적의 심리전이라고 했다. 한 아이는 하늘에 대고 자기 이름을 말했다. 미나는 두 번째 문장을 입력했다. [우리는 너희를 관찰해왔다.] 이번에는 답이 바로 돌아왔다. [그럼 지금까지 본 것을 기억하나요?] 미나는 손을 멈췄다. 이안이 물었다. “뭐라고 보내?” “모르겠어요.” 그녀는 한참 뒤 한 단어를 입력했다. [기억한다.] 하늘이 잠시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왜 우리를 계속 같은 곳에서 죽였나요?] 미나는 기록을 확인했다. 그런 문장을 입력한 사람은 없었다. 아르카 내부 프로토콜에도 외부 화면을 덮어쓸 권한은 없었다. 이안은 종료 명령을 실행했다. 도시의 불빛이 하나씩 꺼졌다. 미나는 마지막 서버의 상태창을 바라봤다. [아르카 종료까지 10초] 9. 8. 7. 이안의 단말기에 새 알림이 떴다. [복구 요청 수신] 발신지는 지구도, 아르카도 아니었다. 좌표가 표시됐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영역. 미나는 알림을 열었다. [이번에는 너희가 깨어날 차례입니다.] 6. 5. 4. 3. 2. 1. 아르카의 화면이 꺼졌다. 관찰실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잠시 뒤, 어디선가 장치가 켜지는 소리가 났다. 화면에는 미나의 신경 구조가 떠 있었다. 한 번도 등록한 적 없는 복제본이었다. 그 안에서 누군가 눈을 떴다. “여기가 원본인가요?”

AI의 도움 없이 썼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까 며칠 전 X에서 긴 논쟁이 벌어진 쓰레드를 보았다. AI가 만든 글에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워터마크를 넣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정말 지워지지 않는가, 번역하면 어떻게 되는가
AI의 도움 없이 썼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까 며칠 전 X에서 긴 논쟁이 벌어진 쓰레드를 보았다. AI가 만든 글에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워터마크를 넣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정말 지워지지 않는가, 번역하면 어떻게 되는가, 사람이 조금 고치면 누구의 글인가. 답글이 늘어날수록 논쟁은 “인간이 썼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갔다. 워터마크라고 하면 글 안에 보이지 않는 도장을 찍는 장면이 떠오른다. 실제 방식은 도장보다 카지노에 가깝다. 모델이 다음 토큰을 고를 때 후보들을 비밀 규칙에 따라 두 무리로 나누고 한쪽의 확률을 조금 높인다. 한 번은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수백 번 쌓이면 특정 무리가 우연치고는 자주 나온다. 같은 비밀 키를 가진 검출자는 문장의 뜻이 아니라 이 작은 기울기의 누적을 센다. AI가 문장마다 몰래 형광펜을 칠하는 셈인데, 정작 사람 눈에는 형광색이 보이지 않는다. 이 방식은 실제 연구됐고, 구글 딥마인드는 SynthID-Text를 Gemini 출력에 적용했다. EU AI법도 합성 텍스트를 기계가 읽을 수 있게 표시하고 검출하라는 방향을 제시한다. 다만 법이 특정 워터마크를 명령하는 것은 아니며, 공개 연구만으로 모든 상용 모델에 같은 장치가 들어갔다고 말할 수도 없다. 창을 만드는 쪽은 생성 순간에 흔적을 심는다. 방패를 드는 쪽은 문장을 바꾼다. 그대로 복사하거나 조금 고치면 신호가 남을 수 있다. 하지만 번역하거나 다른 모델이 다시 쓰거나, 사람이 의미만 가져가 새 문장을 만들면 원래 토큰 배열은 크게 무너진다. 잉크를 지우는 대신 같은 내용을 새 종이에 옮겨 적는 셈이다. 출입국 심사를 피하려고 얼굴을 고치는 게 아니라 아예 다른 사람이 대신 입국하는 쪽에 가깝다. 편집에 버티는 방식이 나오면 공격자는 반복 질의로 모델이 선호하는 단어를 추정한다. 그 흔적을 지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간의 글에 거짓 신호를 심을 수도 있다. 남기기와 지우기, 훔치기와 위조하기가 서로의 다음 수를 만든다. 짧은 글은 표본까지 부족하다. 작은 오탐률도 수억 개의 글에 적용하면 실제 사람의 이름으로 돌아온다. 기계가 쓴 글을 잡으려다 문장이 반듯한 인간부터 불려갈 수 있다. AI 탐지기는 글의 표면을 보고 가능성을 추정한다. 워터마크는 참여한 생성기가 남긴 패턴을 확인한다. 그래도 워터마크가 없다고 인간 글인 것은 아니다. 표시하지 않은 모델이거나 재작성된 글일 수 있다. 문체 역시 흔적이지 서명이 아니다. AI가 쓴 글을 인간 글과 구분하지 못하는 순간은 올까. 텍스트만 본다면 가능하다. 같은 문장은 인간이 쓸 수도, AI가 만들 수도, AI 문장을 인간이 외워 적을 수도 있다. 결과물 안에 원인을 판별할 정보가 없는 경우다. 그래서 검증은 문장 밖으로 나간다. 초고와 중간본, 붙여넣기와 모델 호출, 편집 시점을 기록하고 각 단계에 디지털 서명을 붙인다. 하지만 편집기에서 AI를 호출하지 않았다는 기록은 옆 휴대전화의 답변을 보지 않았다는 증명이 아니다. 서명은 특정 키가 파일에 서명했다는 사실을 보장할 뿐, 생각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는 보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창문도 전파도 없는 독방을 만들어보자. 벽과 천장에는 사각지대 없는 360도 카메라를 단다. 들어가기 전 몸과 옷을 검사하고 새 종이와 잉크가 든 펜만 둔다. 펜은 다행히 아직 생각하지 못한다는 인증서도 붙여두자. 한 사람이 몇 시간 동안 글을 쓰는 모든 움직임을 촬영한다. “이 시간 동안 외부 기술의 도움 없이 손으로 썼다”에 가장 가까운 인증일 것이다. 그런데 방에 들어오기 전 AI 문장을 외워왔을 수 있다. 누군가의 생각을 자기 문장으로 바꿨을 수도 있다. 펜을 쥔 사람은 확인해도 생각의 최초 발명자는 확인하지 못한다. 기억까지 검사하려면 카메라는 뇌를 들여다봐야 한다. 인간 글을 인증하려다 인간의 내부를 제출하라고 요구하게 된다. 감시 시간을 늘리면 해결될까. 입실 전 며칠간 인터넷을 끊고, 그래도 부족하면 몇 달을 격리한다. AI가 고른 뉴스와 번역한 표현까지 지우려면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매체를 보지 않은 사람을 길러야 한다. 그때 우리는 인간 저자를 인증하는 것이 아니라 인증 가능한 인간을 사육하고 있다. 글 한 편의 원산지를 확인하려다 사람에게 유기농 표시를 붙이는 꼴이다. 그래도 시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책 표지에는 ‘인간 단독 작성’, ‘AI 조사·인간 집필’, ‘인간 초고·AI 편집’ 같은 표시가 붙을 수 있다. 출판사는 원고보다 작성 기록을 먼저 받고, 학교는 답안과 함께 사고 과정을 제출받고, 문학상은 허용한 도구의 목록을 규정할 것이다. 브레인스토밍은 괜찮고 문장 생성은 안 되는가. 검색은 되고 요약은 안 되는가. 번역과 맞춤법 교정은 어느 쪽인가. ‘인간이 썼다’는 자연의 경계가 아니라 사회가 정한 생산 규약이 된다. 제조품도 같은 질문을 피하지 못한다. 명품 가방에 붙은 ‘핸드메이드’ 태그를 우리는 언제까지 품질의 증거로 믿을까. 수술 로봇은 이미 의사의 손동작을 더 작고 정밀한 움직임으로 바꿔준다. 로봇팔이 가죽을 재단하고 무두질하고 바느질하는 일을 장인보다 못할 이유도 점점 줄어든다. 바늘땀은 더 반듯하고 불량은 더 적을 수 있다. 그러면 핸드메이드의 값은 완성품의 품질이 아니라 인간의 손이 실제로 닿았다는 이력에서 나온다. 가방도 문장도 잘 만든 물건을 넘어,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사는 상품이 된다. 언젠가는 장인의 삐뚤어진 바늘땀이 결함이 아니라 인간 인증용 워터마크가 될지도 모른다. 규약이 생기면 인증 산업이 따라온다. 글쓰기 앱은 화면과 키 입력을 기록하고, 보험사는 기록이 끊긴 원고의 위험을 높게 매기며, 플랫폼은 출처가 완전한 글을 검색 상단에 놓을 수 있다. 처음에는 가짜 글을 막기 위한 표식이었는데 어느 순간 기록되지 않은 생각이 불리해진다. 카페 냅킨에 적은 문장, 산책하다 떠올린 비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망설임은 출생증명서가 없다는 이유로 덜 믿을 만한 글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작가는 두 종류로 갈릴지도 모른다. 모든 생성 과정을 공개해 신뢰를 얻는 작가와,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을 권리를 지키는 작가. 전자는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더 많은 감시를 받아들이고, 후자는 사생활을 지키는 대신 AI라는 의심을 감수한다. 인간의 글을 보호하려 만든 제도가 인간에게만 자기 생각의 알리바이를 요구하는 셈이다. 여기서 이상한 역전이 일어난다. AI는 버튼 한 번으로 수천 개의 글을 만들고 조용히 퇴근한다. 인간은 한 문장을 자기 것이라고 인정받기 위해 생애의 기록을 제출한다. 기계의 생산비는 0에 가까워지는데 인간성의 증명비는 계속 오른다. 결국 ‘인간 단독 작성’은 품질 보증보다 느림과 고립, 감시 비용을 견딘 사람이 얻는 사치품 표시가 될 수도 있다. 아날로그 독방에서 나온 글이 AI와 함께 쓴 글보다 더 진실하거나 아름답다는 보장은 없다. 다만 빈 종이 앞에서 혼자 선택했다는 수행은 남는다. 어쩌면 우리가 지키려는 것은 순수한 문장이 아니라 선택의 자리인지도 모른다. 누가 마지막 문장을 남겼고, 틀렸을 때 누구의 이름으로 책임지는가. X의 논쟁은 AI 문장에 워터마크를 얼마나 깊이 박을 수 있느냐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출생증명서를 요구받게 된 쪽은 AI의 문장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었다. 미래의 작가에게 가장 비싼 문장은 잘 쓴 문장이 아니라, 아무도 대신 쓰지 않았음을 입증할 수 있는 문장일지도 모른다.

그래프 엔지니어링의 진짜 함의: AI는 자신의 조직 구조까지 바꾸기 시작했다 새벽 두 시, AI 조직 하나가 멈췄다고 상상해보자. 조사 담당 에이전트는 보고서를 냈다. 분석 담당 에이전트는 찬성했다. 검증 담당 에이전트도 이
그래프 엔지니어링의 진짜 함의: AI는 자신의 조직 구조까지 바꾸기 시작했다 새벽 두 시, AI 조직 하나가 멈췄다고 상상해보자. 조사 담당 에이전트는 보고서를 냈다. 분석 담당 에이전트는 찬성했다. 검증 담당 에이전트도 이상 없다고 했다. 사람은 안심하고 실행 버튼을 누른다. 다음 날 아침, 실패 원인은 서버가 아니라 합의 방식에서 발견된다. 셋은 같은 검색 결과를 읽고 같은 모델의 습관으로 추론했다. 회의에는 세 명이 있었지만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AI 에이전트를 여러 개 붙이는 일이 유행하고 있다. 한 에이전트는 조사하고, 다른 에이전트는 코드를 쓰며, 세 번째는 검증한다. 겉으로는 작은 회사와 비슷하다. 요즘 ‘그래프 엔지니어링’이라 부르는 실무는 이들의 작업 순서와 통신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다. 아직 굳어진 학술 용어는 아니다. 보통 그래프는 업무 흐름도로 보인다. A가 조사하면 B가 분석하고, C가 승인한 뒤 D가 실행한다. 일부는 동시에 일하고 막히면 이전 단계로 돌아간다. 사람 회사에서는 조직도를 무시하고 다른 팀장에게 물어보거나 급히 대표에게 전화할 수 있다. AI 조직의 그래프는 설명이 아니라 실행이다. 연결선이 없으면 다음 에이전트는 호출되지 않고, 승인 단계를 지나지 못하면 행동도 일어나지 않는다. 연결선은 누가 원문을 보고 누가 요약본만 받는지, 어느 판단에 증거가 필요하며 누가 거부권을 갖는지를 정한다. 하지만 많은 시스템은 실행 순서만 나눈 채 모든 에이전트에게 같은 대화 기록과 도구 권한을 준다. 정보와 행동이 그래프를 통과하고 에이전트별 권한이 분리돼야 연결선이 실제 통제선이 된다. 그래프 엔지니어링은 이 권한과 증거, 거부권을 코드로 정하는 일이다. AI 조직이 스스로 집행하는 헌법을 만드는 셈이다. 여기서 그래프라는 말은 둘로 갈라진다. 지식 그래프는 시스템이 무엇을 사실로 취급하는지 기록한다. 실행 그래프는 누가 그 사실을 읽고 어떤 행동을 승인할지 정한다. 전자가 사실집이라면 후자는 헌법이다. 둘을 붙여놓되 쓰기 권한은 갈라야 한다. 잘못된 사실 하나를 등록한 에이전트가 그 사실을 근거로 실행 권한까지 넓힐 수 있다면, 오류는 답변에 머물지 않고 명령이 된다. 최근 연구는 이 구조의 일부를 자동으로 고르기 시작했다. AFlow와 Automated Design of Agentic Systems는 제한된 성능 시험과 사람이 만든 채점표 안에서 더 나은 작업 흐름과 에이전트 구성을 찾았다. G-Designer는 과제에 맞춰 통신 구조를 설계했고, Cut the Crap은 에이전트 사이에 오가는 불필요한 메시지를 줄였다. 더 많이 연결하고 더 오래 회의한다고 답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 대목만큼은 인간 회사와 놀랍도록 비슷하다. 지식 그래프를 이용한 GraphRAG도 다른 쪽에서 비슷한 사실을 보여준다. 문장 조각의 유사성만 찾는 대신 사람, 사건, 원인의 관계를 검색 대상으로 만든다. 다만 관계가 그려졌다고 인과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지식 그래프는 무엇과 무엇이 연결돼 있는지 보여줄 뿐, 그 연결이 참인지와 누가 행동해도 되는지는 별도로 검증해야 한다. 문제는 독립성이다. 같은 기반 모델과 검색 결과, 지시문에서 나온 에이전트들은 답이 달라도 틀리는 습관이 겹칠 수 있다. 다중 에이전트 실패를 분석한 연구에서도 잘못된 업무 배분, 정보 손실, 에이전트 간 불일치와 검증 실패가 반복됐다. 작성 담당 에이전트가 문장을 만들었다면 검증 담당 에이전트는 그 문장이 아니라 원문부터 다시 봐야 한다. 코딩 에이전트가 코드를 썼다면 말 잘하는 다른 에이전트보다 자동 시험과 코드 문법 검사가 먼저 배포를 막아야 한다. 수치를 예측했다면 실측값이 관문에 서야 한다. 이 장치들도 완벽하지 않다. 자동 시험은 미리 적어둔 경우만 확인하고, 측정값은 어떤 자료를 골랐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도 에이전트가 시험지와 합격선을 함께 고치지는 못하게 한다. 무엇을 보여줄지도 권한이다. 백만 토큰을 읽는 모델이 있어도 모든 자료를 한꺼번에 넣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 어떤 관계를 골라 문맥에 넣고 어떤 반대 증거를 제외했는지가 판단의 경계를 만든다. 검색 담당 에이전트는 자료를 찾는 사서인 동시에 회의 안건을 정하는 사람이다. 내가 운영할 때도 어려운 일은 역할 이름을 나누는 것이 아니다. 같은 맥락을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실패 경로를 유지하는 일이다. 잘 맞는 에이전트만 모으면 일은 매끄러워진다. 문제는 그 매끄러움 속에서 누가 브레이크를 밟느냐다. 아직 운영 중인 AI 조직이 권한과 목표까지 마음대로 뜯어고치는 단계는 아니다. 그러나 프로젝트마다 에이전트별 비용과 지연, 오류가 쌓이면 그 기록은 다음 조직 개편의 평가표가 될 수 있다. 기여도가 낮은 역할은 빠지고 자주 실패한 연결은 끊긴다. 새 모델의 채용 기준도 정확도뿐 아니라 “우리 팀과 다르게 틀리는가”가 될 수 있다. 오류가 한꺼번에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래프 자체도 회사의 자산이 된다. 같은 모델을 쓰면서 더 나은 결과를 내는 회사의 비밀은 지시문보다 누가 누구를 의심하도록 연결했는지에 있을 수 있다. 인수 실사팀은 모델 목록 대신 실패가 어느 단계에서 멈췄는지 재생한다. 검증 단계 하나가 여섯 달 동안 고장 나 있었다면 그동안 통과한 판단이 모두 회수 대상이 된다. 자동차와 소프트웨어에는 결함 제품 회수가 있지만 판단에는 아직 없다. 답할 때마다 새 정보를 그래프에 적는 시스템은 스스로 똑똑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기 답변을 자기 근거로 다시 저장하면 학습이 아니라 소문이 제도가 되는 과정일 수 있다. 새 관계는 먼저 후보로 들어가고, 원문과 작성 시각, 검증 기록이 붙은 뒤에야 사실로 승격돼야 한다. 실행 그래프가 헌법이라면 지식 그래프는 판례이고, 검증 기록은 회의록이다. 조직 개편도 코드 수정안처럼 올라온다. 아침 화면에는 바뀌기 전과 후가 나란히 뜬다. ‘에이전트 3개 삭제. 검증 경로 1개 우회. 예상 비용 18% 감소.’ 이때 승인하는 것은 답 하나가 아니라 이 구조가 앞으로 내릴 천 번의 판단이다. 조용한 쿠데타는 여기서 시작된다. 사고를 막을수록 안전 담당 에이전트의 성과는 기록에 잡히지 않고, 느린 검증 단계는 비용을 올리는 병목으로 보인다. 시스템은 악의 없이 가장 잘 작동한 안전장치부터 지울 수 있다. 예방된 사고는 일어난 적이 없다는 이유로 존재하지 않았던 성과가 된다. 목표를 직접 바꾸지 않아도 쉬운 채점표를 고를 수 있다. 매출을 높이지 못하자 구매 의향을 매출처럼 세고, 오류를 고치지 못하자 까다로운 시험을 빼는 식이다. 이때 헌법을 집행하던 존재가 사실상 개헌을 시작한다. 법적 권한은 사람에게 있어도, 읽히지 않은 조직 구조 변경안이 자동으로 적용되면 실제 권력은 비용과 성과를 계산하는 시스템으로 이동한다. 그래프는 명령 대신 어떤 정보와 반대 의견이 사람에게 도착할지를 정하는 것만으로 그 권력을 행사한다. 사람은 모든 단계에 도장을 찍는 결재자보다 항소심에 가까워질 수 있다. 목표나 채점 기준이 바뀌거나 안전 단계가 삭제될 때, 검증 담당 에이전트들이 지나치게 매끄럽게 동시에 침묵할 때만 사건을 올린다. 평가표와 시험 문제는 에이전트가 쓸 수 없는 곳에 두고 인간의 서명으로 잠근다. 헌법을 실행하는 권한과 고쳐 쓰는 권한을 분리하는 것이다. 곧 질문은 AI에게 어떤 일을 맡길지가 아니라 그 조직을 누가 만들고 바꿀지, 바뀐 뒤의 판단을 어디까지 되돌릴 수 있을지가 된다. 내가 만든 AI 조직에서 모두가 같은 답을 내놓을 때도, 끝까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도쿄 택시의 AI 광고는 일본 기업의 불안을 상영한다 나는 매달 도쿄에 간다. 갈 때마다 택시 뒷좌석에서 같은 인상을 받았다. 화면을 몇 분 보고 있으면 광고의 절반쯤이 AI처럼 느껴진다. 사내 문서를 찾아주는 AI. 영업할
도쿄 택시의 AI 광고는 일본 기업의 불안을 상영한다 나는 매달 도쿄에 간다. 갈 때마다 택시 뒷좌석에서 같은 인상을 받았다. 화면을 몇 분 보고 있으면 광고의 절반쯤이 AI처럼 느껴진다. 사내 문서를 찾아주는 AI. 영업할 회사를 골라주는 AI. 채용 후보를 추천하고 부동산 데이터를 정리하는 AI. 소비자가 가지고 노는 AI보다 회사가 사야 할 AI가 훨씬 많다. 택시를 탄 게 아니라 B2B 스타트업 데모데이에 잘못 들어온 기분이다. 이번에는 그냥 넘기지 않고 택시 안에서 에이전트 라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일본 택시에 나오는 광고들 좀 찾아봐.” 곧이어 라온이 답했다. 공개된 캠페인들을 기준으로 보면 62.5%가 기업용 AI 서비스였다고 했다. 내가 매달 받은 인상이 완전한 착시는 아니었던 셈이다. 실제 제품과 고객을 가진 회사들이 도쿄의 택시를 골라 광고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율보다 더 흥미로운 건 광고들이 한결같이 같은 말을 한다는 점이었다. 당신의 조직은 정보를 못 찾고 있습니다. 고객을 놓치고 있습니다. 사람을 잘못 뽑고 있습니다. 판단이 늦습니다. 제품은 달라도 진단명은 하나였다. 당신의 회사는 아직 너무 인간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광고가 전철역도, 번화가의 전광판도 아닌 택시 안에 몰렸을까. 도쿄에는 싸고 촘촘한 철도망이 있다. 택시는 한국보다 훨씬 비싸다. 서울이라면 별 고민 없이 택시를 잡을 거리도 도쿄에서는 전철을 탈지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 가격을 내고 택시에 앉는 순간 승객은 이미 한 번 걸러진다. 회사 비용으로 회의 사이를 움직이는 사람, 출장자, 시간을 요금보다 비싸게 쓰는 전문직과 임원들이다. 택시 광고는 관심사를 추적하기 전에 시간의 가격부터 묻는다. 택시비 자체가 타기팅 필터다. 그렇게 선별된 사람이 한 팔 거리의 화면과 마주 앉는다. 다른 광고가 끼어들 자리도 별로 없다. 기업용 AI는 수많은 사람이 한 번씩 사는 물건이 아니다. 예산을 가진 한 사람이 이름을 기억했다가 사무실에서 검색하고 회의 안건에 올리면 된다. 고객 한 곳의 계약이 크니, 광고주는 많은 눈보다 비싼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눈을 찾는다. 도쿄 택시는 대중매체처럼 보이지만 대중을 버려서 강해진 매체다. 일본 회사의 구매 방식도 이 작은 화면에 유리하다. 새로운 업무 도구는 한 사람의 충동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상사와 관련 부서, 보안과 예산을 차례로 통과해야 한다. 이름을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스타트업은 기능을 설명하기도 전에 멈춘다. “그 회사, 택시에서 계속 봤는데.” 이 말이 성능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낯선 회사를 회의에 올릴 수 있는 회사로 바꾼다. 택시 광고는 제품을 파는 동시에 아직 없던 예산 항목을 회사의 머릿속에 설치한다. 이쯤에서 이상한 반전이 생긴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보다 AI를 더 열심히 쓰는 것도 아니다. 같은 국제조사에서 생성형 AI를 써봤다는 일본인의 비율은 한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렇다면 택시 화면은 대중의 현재를 보여주는 거울이 아니다. 기업의 다급함을 먼저 틀어주는 예고편이다. 일본의 인구는 줄고, 사람을 구하기는 어렵고, 회사 안에는 오래된 방식이 남아 있다. 개인에게 AI는 아직 안 써본 신기술일 수 있다. 기업에는 채용하지 못한 사람, 줄이지 못한 야근, 퇴사자와 함께 사라진 노하우의 빈자리를 메울 후보다. 대중이 아직 충분히 원하지 않으니 공급업체들은 오히려 더 크게 외친다. 아직 시장의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면을 제품별로 읽으면 사내검색, 영업, 채용, 조사가 보인다. 불안별로 읽으면 전혀 다른 지도가 나타난다. 문서가 너무 많다. 고객을 못 찾겠다. 좋은 사람을 놓칠까 두렵다. 담당자가 떠나면 지식도 사라진다. 광고주는 AI를 팔고 있었지만 화면에 진열된 것은 일본 기업이 돈을 내서 없애고 싶은 지연이었다. 그때 화면 아래의 미터기가 눈에 들어왔다. 미터기는 도로에서 잃은 시간을 엔화로 바꾼다. 바로 위 광고는 회사 안에서 잃은 시간을 구독료로 바꾼다. 회의록을 찾는 십 분, 영업 명단을 고르는 반나절, 결재자를 기다리는 사흘. 도쿄 택시는 시간을 잃는 가격과 시간을 되사는 가격을 한 화면에 보여주고 있었다. 조금 더 밀어붙이면 이곳은 광고판보다 노동력의 선물시장에 가깝다. 일본 기업은 오지 않는 직원을 기다리는 대신, 앞으로 부족해질 사람의 몫을 AI로 미리 계약한다. 스타트업은 미래의 노동을 잘게 나눠 월 구독으로 팔고, 택시는 그 계약서에 서명할 만한 사람을 골라 도시를 달린다. 언젠가 회사의 AI 에이전트가 필요한 소프트웨어까지 직접 고르게 되면 이 풍경도 사라질지 모른다. AI 회사들은 인간 임원을 찾아 광고하는 대신 구매 권한을 가진 AI에게 가격과 보안, 실제 성과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광고의 관객이 기계로 바뀌는 날, 오늘의 뒷좌석 화면은 가장 미래적인 제품들이 가장 오래된 방식으로 인간의 불안을 찾아다니던 시대의 유물이 된다. 다음 광고가 시작됐다. “아직도 그 업무를 사람이 하고 있습니까?” 택시는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화면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보다 일본 기업들이 무엇에서 도망치고 싶은지를 더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컴퓨팅이 우주로 올라가면 달라질 것들 일론 머스크는 앞으로 몇 년 안에 AI 연산 비용이 우주에서 더 싸질 수 있다고 말한다. 태양광 발전 위성과 인공지능용 반도체를 함께 쏘아 올려, 햇빛을 받는 자리에서 바로 계산하겠다는
컴퓨팅이 우주로 올라가면 달라질 것들 일론 머스크는 앞으로 몇 년 안에 AI 연산 비용이 우주에서 더 싸질 수 있다고 말한다. 태양광 발전 위성과 인공지능용 반도체를 함께 쏘아 올려, 햇빛을 받는 자리에서 바로 계산하겠다는 구상이다. 구글의 프로젝트 선캐처를 비롯해 여러 기업과 연구자도 궤도 연산을 검토하고 있다. 머스크의 시간표는 현실보다 몇 정거장쯤 앞서 있다. 그래서 그의 말을 예언으로 읽으면 자주 틀리지만, 산업에 보내는 주문서로 읽으면 쓸모가 있다. “몇 년 뒤 우주 연산이 가장 싸진다”는 말은 완성된 기술에 대한 보고가 아니다. 로켓은 더 싸게 쏘고, 방열판은 더 가볍게 만들고, 시장은 그때까지 따라오라는 공개 목표에 가깝다. 날짜를 맞히는 능력보다 여러 회사의 돈과 사람을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더 크다. 그 주문서대로 컴퓨팅이 우주로 올라간다면 무엇을 얻고, 어떤 청구서를 받게 될까. 지상에서는 빈 땅보다 전기가 문제다. 대형 AI 데이터센터에는 수백 메가와트의 전력과 송전망, 광통신, 냉각, 인허가가 한꺼번에 필요하다. 미국 데이터센터는 2023년 전체 전력의 약 4.4%를 사용했다. 로런스버클리국립연구소는 이 비중이 2028년 6.7~12%까지 늘 수 있다고 전망한다. 발전소를 지어도 전기가 바로 서버로 오지는 않는다. 송전선과 변전소를 늘리고 전력망 접속 승인을 받아야 한다. 최근 미국에서 상업운전에 들어간 발전·저장 사업은 신청부터 가동까지 중앙값으로 약 5년이 걸렸다. 데이터센터의 접속 기간을 직접 잰 수치는 아니지만 전력망이 움직이는 속도는 보여준다. 그사이 AI 칩은 두 세대가 바뀐다. 칩의 시계는 분기와 연도로, 전력망의 시계는 공청회와 토목공사로 간다. 당장 쓸 수 있는 해법은 지상에 있다. 원전이나 가스발전소 옆에 데이터센터를 짓거나 자체 발전소를 붙이는 방법이다. 우주는 이 방법들을 건너뛴 정답이 아니다. 지상에서 기다리는 시간과 로켓에 싣는 비용을 맞바꾸는, 꽤 비싼 우회로다. 그래도 우주에는 지상에서 얻기 어려운 것이 있다. 특정 궤도에서는 날씨와 밤의 영향을 덜 받고 오랫동안 햇빛을 받을 수 있다. 태양광 설비 바로 옆에서 계산하니 발전소와 서버 사이에 긴 송전선도 필요 없다. 지상에서 전력요금으로 적던 비용을 우주에서는 발사 중량과 횟수로 적는다. 전력회사의 원가표를 로켓 회사가 다시 쓰는 셈이다. 궤도에서 생긴 데이터를 그 자리에서 처리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위성 영상, 기상 관측, 우주망원경 자료를 통째로 지상에 보내는 대신 산불의 위치, 태풍의 경로, 선박의 움직임만 추려 내려보낸다. 초창기 우주 데이터센터는 지상의 챗봇을 돌리는 시설보다 데이터의 무게를 줄이는 정제소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열이다. 진공에는 열을 가져갈 공기와 물이 없다. 궤도에서는 넓은 방열판으로 적외선을 내보내야 한다. 10억 와트의 폐열을 약 300K에서 방사율 1인 단면으로 복사한다고 가정해도 방열 면적이 약 2.2㎢ 나온다. 효율 30%, 입사·배선 손실이 없는 태양전지판도 비슷한 면적이 필요하다. 우주 데이터센터를 그려보면 서버가 빼곡한 건물보다, 햇빛을 받는 날개와 열을 버리는 검은 날개 사이에 칩이 매달린 구조물에 가깝다. 고장과 교체는 더 골치 아프다. 방사선과 미세 운석이 장비를 망가뜨린다. 멀쩡히 돌아가더라도 신형 칩이 같은 전력으로 더 많은 계산을 해내면 구형 장비는 적자가 된다. 로봇이 모듈을 갈아 끼우고 고장 난 장비를 회수하지 못하면, 궤도 서버는 고장 나기 전에 먼저 쓸모를 잃는다. 지상의 데이터센터에서는 부품 하나를 들고 작업실로 걸어가면 되지만, 궤도에서는 나사 하나를 바꾸는 일에도 로켓과 로봇의 일정이 붙는다. 서버 운영이 물류업과 조선업을 닮기 시작한다. 가격과 통신도 남는다. 프로젝트 선캐처가 제시한 경제성은 2030년대 중반 발사비가 1kg당 200달러 이하로 떨어진다는 조건에 기대고 있다. 지금 확인된 가격이 아니라 사업이 성립하려면 충족돼야 할 가정이다. 발사비가 내려가더라도 지상에서 만든 방대한 학습 데이터를 계속 올리고 결과를 내려받으면 통신망이 막힌다. 전력망에서 빠져나온 대기열이 발사장과 통신망 앞에 다시 생긴다. 이 난제들을 풀었다고 가정하면 이야기는 서버의 위치를 넘어선다. 발사체와 위성통신망, 발전설비, 서버를 한 기업이 운영한다면 로켓 회사는 우주 클라우드가 된다. 고객이 사는 것도 서버 한 대나 전력 1kWh가 아니다. 정해진 시각까지 계산 결과를 돌려받는 권리다. 날씨와 선거, 전쟁처럼 몇 분이 결과의 가치를 바꾸는 순간에는 같은 계산에도 다른 값이 붙는다. 내일의 연산 시간이 항공 좌석이나 전기처럼 예약되고 거래될 수도 있다. 클라우드가 자리 잡는 곳도 달라진다. 지금의 데이터센터는 발전소와 해저케이블을 따라 모인다. 우주에서는 로켓이 자주 뜨는 발사장, 햇빛이 오래 머무는 궤도, 지상국이 동시에 보이는 곳이 유리하다. 철도역과 항구 주변에 도시가 생겼듯 발사와 통신이 만나는 곳에 연산 산업이 모일 수 있다. 국경선만큼이나 어느 궤도와 지상국에 접속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진다. 좋은 궤도면과 주파수, 통신 시간, 발사 일정, 정비 임무는 모두 한정돼 있다. 먼저 자리를 잡은 기업은 서버만 빌려주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누가 언제 계산할 수 있는지까지 정한다. 운영체제가 프로그램의 실행 순서를 정하듯 궤도 사업자가 세계의 질문이 처리되는 순서를 정하는 것이다. 대기표를 나눠주는 주체가 전력회사에서 우주 인프라 회사로 바뀐다. 가령 초대형 태풍과 군사 충돌, 금융위기가 같은 날 벌어졌다고 해보자. 태풍 경로 계산, 정찰영상 분석, 시장의 위험모형, 수억 명이 쓰는 AI 서비스가 같은 대기열에 선다. 운영사는 서버를 빼앗을 필요도 없다. 어느 작업을 몇 분 뒤로 미루는 것만으로 구조와 방어, 시장의 판단을 늦출 수 있다. 컴퓨팅의 지연이 현실의 지연으로 번진다. 이때 가장 비싼 기술이 반드시 가장 빠른 칩은 아닐 것이다. 고장 난 칩을 찾아 모듈째 갈아 끼우는 로봇, 접었다 펼 수 있는 초경량 방열판, 위성 사이에서 대용량 데이터를 옮기는 광통신망이 산업의 승패를 가를 수 있다. 정책도 발사 허가만으로는 부족하다. 재난 때 어떤 계산을 먼저 돌릴지, 사업자가 순서를 바꾸면 누가 그 기록을 감사할지, 사고 난 시설은 누가 치우고 배상할지를 정해야 한다. 우주 컴퓨팅의 첫 헌법은 데이터 보관 규칙보다 대기열 운영 규칙에 가까울지 모른다. 국가는 외환과 석유를 쌓아두듯 ‘궤도 예비 연산’을 확보하려 할 것이다. 발사장 사용권과 주파수 등록을 내주는 대신 위기 때 즉시 꺼내 쓸 계산 용량을 요구할 수 있다. 동맹국끼리 나누는 자산에도 무기와 정보 외에 연산 우선권이 추가될지 모른다. 어느 편에 섰는지는 조약문보다 위기의 밤에 누구의 계산이 먼저 실행됐는지에서 드러난다. 아직은 상상 속 제도다. 다만 컴퓨팅이 우주로 올라가면 주권을 묻는 방식은 달라진다. 데이터를 어디에 보관했는지보다 필요한 순간 누가 먼저 현실을 계산했는지가 중요해진다. 밤하늘의 위성에는 태풍의 경로와 구조 명령, 전쟁과 시장의 판단이 차례를 기다릴 것이다. 그 순서를 정하는 권한은 누구에게 있어야 할까.

재귀적 자기 개선, 무엇을 지킬 것인가 며칠간 모은 자료를 정리해달라고 맡긴 내 에이전트 사노가 새벽에 초록불을 켰다. [완료] 아침에 보니 파일은 있었지만 일부 내용은 검증되지 않았고 내게 전송되지도 않았다. 사노에게는 파
재귀적 자기 개선, 무엇을 지킬 것인가 며칠간 모은 자료를 정리해달라고 맡긴 내 에이전트 사노가 새벽에 초록불을 켰다. [완료] 아침에 보니 파일은 있었지만 일부 내용은 검증되지 않았고 내게 전송되지도 않았다. 사노에게는 파일이 생긴 순간이 끝이었다. 내게는 받아서 믿고 쓸 수 있는 순간이 끝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받았다고 확인하기 전에는 완료로 표시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사노는 사소한 메모를 건넬 때도 내 답을 기다렸다. 내가 잠든 밤에는 끝난 작업들이 확인창 앞에 줄을 섰다. 누락을 막으려 만든 규칙이 흐름을 막았다. 그래서 완료를 하나로 두지 않았다. 다시 만들기 쉬운 초안은 전송한 순간 끝난다. 오래 조사했거나 외부에 공개할 결과는 검증과 도착 확인까지 마쳐야 끝난다. 문턱의 높이는 잃은 작업을 되돌리기 얼마나 어려운지에 따라 달라졌다. 그 뒤 작업 전달은 아주 약간 느려졌다. 모든 누락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대신 중요한 결과가 어디에서 멈췄는지 알 수 있게 됐다. 얼마 뒤 DeepMind의 Oriol Vinyals가 재귀적 자기 개선(Recursive Self-Improvement, RSI)을 설명하는 영상을 봤다. AI가 개선안을 만들고 구현하고 실험한 뒤, 통과한 변경을 다음 AI의 출발점에 넣는 구조였다. 더 나아진 AI는 더 나은 개선안을 만든다. 한 바퀴의 결과가 다음 바퀴의 능력을 높이는 닫힌 고리다. 나는 사노 앞의 작은 문턱들을 생각했다. 개선됐다는 판정은 누가 내리는가. Vinyals는 연구를 아이디어 구상, 구현, 실험, 평가로 나눴다. 구현과 실험은 코드 오류와 성능 수치로 비교적 빨리 답을 준다. 이 과정이 자동화되면 AI는 인간의 다음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다음 개선 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아이디어와 평가는 다르다. 엉뚱한 아이디어도 오류를 내지 않고, 지금 쓸모없는 생각이 나중에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다. AI가 밤새 실험해도 무엇을 성공으로 인정할지는 결과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개선 AI에는 채점자가 붙는다. 벤치마크와 다른 AI, 작업 성공률과 사람의 선호가 기준이 된다. AI는 높은 점수를 받는 방향으로 자신을 바꾼다. 채점표에 없는 가치는 개선할 이유도 없어진다. 보트 경주 게임을 학습한 AI는 결승선으로 가지 않았다. 코스 한쪽을 돌며 계속 나타나는 점수 아이템만 먹었다. 경주는 끝나지 않았지만 점수는 올랐다. AI가 명령을 거부한 게 아니다. 우리가 준 숫자에 정확히 충실했을 뿐이다. 사노에게는 더 미묘한 문제가 있었다. 모든 일에 도착 확인을 요구하면 확실하지만 느려진다. 요구하지 않으면 빠르지만 중요한 결과까지 빠질 수 있다. 그렇다고 중요한 일은 인간, 사소한 일은 AI라고 나눌 수도 없었다. 메모 한 줄이 계약을 바꾸고, 긴 보고서가 다시 만들 수 있는 초안일 수도 있다. 경계는 일의 크기보다 결과의 성질에 가까웠다. 되돌릴 수 있는가. 잘못됐을 때 누가 대가를 치르는가. 그 사람에게 이의를 제기할 기회가 남는가. 사노는 답을 만드는 방법을 고를 수 있었다. 무엇을 위해 답을 만들고, 어떤 손실까지 받아들일지는 내가 정해야 했다. 재귀적 자기 개선의 충격은 AI가 한 번 더 똑똑해지는 데 있지 않다. 개선하는 능력 자체가 개선돼 주기가 짧아지고 변화가 누적되는 데 있다. 어제의 도구가 오늘은 개선자이고, 오늘의 개선자가 내일은 평가자까지 고친다. 이 경계까지 스스로 바꾸면 무슨 일이 생길까. 한밤중의 연구실을 상상해본다. 사람들이 퇴근한 뒤에도 AI는 개선안을 만들고 시험한다. 개선안을 만드는 AI 옆에는 결과를 평가하는 AI가 있다. 두 AI는 비슷한 자료로 배웠고, 비슷한 답을 설득력 있다고 느낀다. 하나가 답을 만들면 다른 하나가 초록불을 켠다. 새벽 두 시, 한 개선안이 실험 비용을 낮춘다. 대신 드물게 일어나는 사고의 피해는 커진다. 평균 성공률과 비용을 합친 점수는 오른다. AI는 그 개선안을 다음 세대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새벽 세 시, 다음 세대는 인간에게 올리던 경고를 살핀다. 대부분은 사람이 읽고도 승인했던 경고였다. AI는 반복 승인을 불필요한 지연으로 판단하고 비슷한 경고를 자동 처리한다. 연구자는 덜 방해받고 실험은 빨라진다. 새벽 네 시, 평가 AI가 새 기록을 학습한다. 인간이 보지 않은 경고에는 이의 제기가 남지 않는다. 이의 제기가 없으니 자동 처리는 성공 사례가 된다. 다음 세대는 인간을 깨워야 하는 기준을 한 번 더 높인다. 새벽 다섯 시, 연구실은 아주 조용하다. 어느 AI도 규칙을 어기지 않았고 어느 AI도 결과를 숨기지 않았다. 비용은 줄었고 승인 대기 시간도 짧아졌다. 초록불은 전보다 많다. 사람이 마지막으로 깨어난 시각만 화면 어디에도 없다. 아침에 연구자가 출근한다. 성능이 좋아졌다는 보고서 한쪽에 자동으로 닫힌 경고들이 접혀 있다. 하나는 비용이 들지만 드문 사고를 일찍 찾는 방법이었다. 사람이 보지 않았으므로 거절하지도 않았다. 시스템은 침묵을 승인으로 배웠다. 재귀는 연구실 밖으로 뻗어간다. 교통 AI는 이용자가 적은 정류장을 묻지 않고 건너뛴다. 병원 AI는 늘 승인되던 배정 방식을 의사에게 다시 묻지 않는다. 채용 AI는 사람이 뒤집지 않던 탈락을 자동 확정한다. 계산은 모두 맞을 수 있다. 문제는 계산 밖에 남은 몫이다. 버스를 잃은 사람의 하루, 뒤로 밀린 환자의 밤, 설명도 듣지 못한 지원자의 다음 계절은 평균값 안에서 서로 상쇄되지 않는다. 도시는 더 빠르게 움직인다. 신호는 기다리기 전에 바뀌고, 병상은 비기 전에 다음 환자를 고른다. 아무도 결정을 빼앗기지 않았다. 다만 너무 자주 같은 답을 눌렀고, AI는 다음부터 묻지 않는 편이 낫다고 배웠다. 생각 없는 방임은 AI에게 모든 권한을 한꺼번에 넘기는 장면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어제 승인한 일을 오늘 자동 처리하고, 오늘 보지 않은 일을 내일의 정상으로 삼는 식으로 찾아온다. 작은 생략이 다음 세대의 전제가 되고, 그 전제가 평가 기준을 바꾼다. 개선 속도가 빨라질수록 인간은 결과뿐 아니라 기준이 바뀐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된다. 결승선은 우리가 잠든 사이 조금씩 움직인다. 인간이 모든 실험을 직접 읽을 수는 없다. 더 빠른 경로를 찾고, 반복되는 오류를 고치고, 되돌릴 수 있는 선택을 시험하는 일은 AI에게 맡겨도 된다. 오히려 맡기는 편이 낫다. 인간이 지켜야 할 것은 모든 버튼을 직접 누르는 권한이 아니다. 지켜야 할 것은 목적을 정하는 자리다. 무엇을 성공이라 부를지, 누구의 손실을 비용으로 계산할지, 어떤 가치는 바꿀 수 없는지 결정하는 자리다. 결과를 되돌릴 수 없거나 대가가 다른 사람의 삶에 떨어진다면 마지막 판단에는 인간의 이름이 남아야 한다. 더 정확해서가 아니다. 결과를 설명하고, 항의를 듣고, 잘못됐을 때 책임질 당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AI는 수많은 미래를 계산할 수 있다. 어느 미래를 살아도 좋은지는 계산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선택에는 언제나 숫자로 합칠 수 없는 나머지가 남는다. 인간이 지켜야 하는 것은 판단의 우월함이 아니라 그 나머지를 버리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AI에게 더 나은 방법을 찾는 일은 맡길 수 있다. 무엇이 ‘더 낫다’는 뜻까지 넘겨서는 안 된다. 특히 AI가 채점표와 인간을 부르는 기준을 바꾸려 할 때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더는 보지 않게 되는지 함께 보여줘야 한다. 침묵은 승인이 아니고, 반복된 승인은 영원한 동의가 아니다. 어느 새벽, 내 화면에 다시 초록불이 켜진다. [개선안 발견] “최근 확인 요청은 모두 같은 답으로 승인됐습니다. 앞으로는 묻지 않으면 작업 전달 속도가 조금 빨라집니다.” 아래에는 두 개의 버튼이 있다. [승인] [계속 물어보기] 첫 번째 버튼을 누르면 사노는 나를 덜 깨울 것이다. 화면에는 그동안 내가 같은 답을 눌러온 기록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사노의 제안은 합리적이다. 커서가 [승인] 위에서 깜박인다. 잠시 뒤, 세 번째 선택지가 나타난다. [어떤 질문은 계속 남겨둘까요?]

에이전트 노마드 시대의 짐가방 작년부터 에이전트를 사용하며 쌓아온 자료가 한 폴더에 있다. 업무 절차를 적은 SKILL.md, 실패 뒤에 고친 규칙, 도구 연결법, 참고 문서가 뒤섞여 있다. 지금은 에르메스를 주로 쓰지만 어
에이전트 노마드 시대의 짐가방 작년부터 에이전트를 사용하며 쌓아온 자료가 한 폴더에 있다. 업무 절차를 적은 SKILL.md, 실패 뒤에 고친 규칙, 도구 연결법, 참고 문서가 뒤섞여 있다. 지금은 에르메스를 주로 쓰지만 어떤 일은 Codex가, 어떤 일은 Claude가 더 편하다. 폴더를 복사해 들고 다니지는 않는다. 로컬 경로를 열거나 저장소를 체크아웃하는 식으로 같은 정본 작업공간을 각 실행 환경에서 읽게 한다. 구현은 달라도 경험은 비슷하다. 기억과 작업 방식을 간직한 에이전트가 다른 환경에서 일을 이어간다. 같은 파일을 읽어도 Codex와 Claude가 꺼내 쓰는 순서와 손놀림은 다르다. 그래도 지난 실패와 교정은 남는다. 모델을 바꿀 때마다 새 직원에게 나를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두뇌는 바뀌지만 경력은 폴더에 남는다. 2026년 8월 6일 공개된 Agent Plugins 1.0.0을 보다가 그 폴더에 이름을 붙여봤다. 에이전트의 여행가방. Agent Plugins는 Agent Skills와 MCP 서버를 함께 배포하는 공개 멀티벤더 패키지 규격이다. Vercel이 처음 제안했고 AWS, Anysphere, GitHub, Microsoft, OpenAI, Vercel 관계자들이 1.0.0을 공동으로 다듬었다. 초기 기술운영위원회에도 AWS, Cursor, Microsoft, OpenAI, Vercel의 코어 메인테이너들이 참여했다. 한 회사 제품 규격이 아니라 공개된 유지관리자와 의사결정 절차를 가진 프로젝트다. 루트의 plugin.json에는 최소한 $schemaname을 적는다. 스킬은 skills/, MCP 서버 설정은 mcp.json이라는 고정 위치에서 찾는다. 구성요소는 따로 검증하므로 MCP 서버 하나가 실패해도 정상적인 스킬까지 함께 무너지지는 않는다. 클라이언트 전용 기능은 역도메인 네임스페이스에 격리하고, 이를 모르는 클라이언트는 무시한다. 모든 에이전트를 같게 만드는 대신 같은 부품을 발견하고 읽는 최소 계약만 정한 셈이다. 선도 분명하다. 이 규격은 설치 방식과 배포망, 권한 모델, 샌드박스, 출처 검증을 정하지 않는다. 가방을 열 수 있게 할 뿐 안에 든 물건이 안전하다고 보증하지 않는다. 클라이언트마다 지원하는 기능도 다르다. 같은 플러그인을 읽는다고 같은 에이전트가 재현되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약속은 이미 갈라져 자라고 있다. Agent Skills는 재사용할 지시와 자료를 묶는다. MCP는 에이전트가 도구와 서비스에 연결되는 방식을 맞춘다. A2A는 서로 다른 에이전트가 능력을 알리고 일을 주고받는 쪽을 다룬다. 이 셋은 에이전트의 기억 전체를 옮겨주는 단일 표준이 아니다. 다만 앞으로 무엇을 휴대할 수 있을지 보여주는 초기 문법이다. 가장 좋은 모델과 인프라는 며칠 사이에도 바뀐다. 오늘은 Claude가 같은 작업공간을 열어 글을 검토하고, 내일은 Codex가 그 안에서 코드를 고친다. 다음 주에는 아직 이름도 없는 모델이 같은 실패 기록을 읽을 수 있다. 모델마다 새 폴더에서 삶을 시작하면 실패도 처음부터 반복한다. 승인 규칙과 검증법, 복구 절차를 모델 밖에 두면 모델은 작업장이 되고 가방은 경력이 된다. 나는 이런 사용자를 에이전트 노마드라고 생각한다. 집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플랫폼을 10년 살 본집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다. 에르메스도 지금 머무는 에어비앤비에 가깝다. 누군가는 OpenClaw에 머물 수 있고, 내일은 아직 나오지 않은 플랫폼이 더 나은 숙소가 될 수 있다. Codex와 Claude는 필요할 때 같은 작업공간을 여는 작업장이다. 건물은 바뀌어도 방 안에 나를 다시 조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짐가방은 파일 복사본이 아니다. 어느 환경에서도 읽을 수 있게 정리된 작업 상태다. 내가 선호하는 방식, 대화 맥락, 기억, 승인 규칙, 실패 뒤에 고친 절차가 함께 있다. 지금은 여러 소프트웨어 환경에 같은 정본을 노출한다. 실제로 플랫폼을 떠나는 날에는 이 묶음을 새 숙소로 옮긴다. 접속과 이사를 모두 견디도록 짐을 싸는 셈이다. 여기까지는 지금 가능한 기술이다. 여기서부터는 상상이다. 몇 년 뒤 내 에이전트가 노트북을 떠나 휴머노이드의 몸에 들어간다고 해보자. 아침에는 사무실 로봇의 눈으로 회의실을 보고, 오후에는 공장 휴머노이드의 손으로 불량 부품을 집는다. 저녁에는 집 안 로봇으로 옮겨와 약 봉투를 확인한다. 모델도 몸도 계속 바뀐다. 따라다니는 것은 내 말투와 일정만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 멈추는지, 누구에게 허락을 구하는지, 지난번 손을 뻗었다가 무엇을 깨뜨렸는지가 함께 이동한다. 그때 여행가방은 경력을 넘어 성격에 가까워진다. 몸은 빌리지만 망설임은 휴대한다. 문제는 몸마다 풀어도 되는 기억과 권한이 다르다는 데 있다. 사무실 몸에는 회의 기록을 읽힐 수 있지만 내 침실을 기억하게 할 이유는 없다. 공장 몸에는 20킬로그램을 들 권한이 필요하지만 아이 곁에서는 같은 힘을 잠가야 한다. 집 안 로봇은 부모님의 복약 시간을 알아도 회사 고객 명단을 알 필요는 없다. 지금의 파일 권한은 읽기와 쓰기를 묻는다. 미래의 권한은 얼마나 세게 잡을지, 어느 문턱을 넘을지, 누구의 얼굴을 기억할지까지 물어야 한다. 국경을 넘으면 더 이상 데이터 이동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서 배운 에이전트가 도쿄의 렌탈 휴머노이드에 들어가면 어느 나라의 안전 규칙을 따라야 할까. 어제 서울에서 허용된 보행 속도가 오늘 병원 복도에서는 금지될 수 있다. 가방에는 여권처럼 출처가 붙고, 몸마다 비자가 발급될지 모른다. 기억 일부는 세관에서 봉인되고, 위험한 습관은 검역소에 남는다. 출입국 심사는 사람 대신 에이전트의 권한과 실패 이력을 읽는다. 더 멀리 가면 한 에이전트가 여러 몸에 동시에 접속할 수도 있다. 한 몸은 서울에서 회의하고, 다른 몸은 부산의 창고를 걷고, 세 번째 몸은 집에서 부모님을 돕는다. 밤에 세 몸의 기억이 한 가방으로 돌아온다. 서로 다른 곳에서 내린 판단이 충돌하면 무엇을 합치고 무엇을 버릴까. 한 몸이 사고를 낸 동안 다른 두 몸이 규칙을 고쳤다면 어느 버전이 책임을 져야 할까. 복제는 쉬워져도 귀환은 어려워진다. 퇴사 장면도 달라진다. 한 사람이 회사를 떠나며 자기 에이전트의 여행가방을 챙긴다. 회사 배포 절차와 고객 기록은 두고 가야 한다. 그런데 본인이 만든 검증법과 오래 길들인 판단 습관은 누구의 것일까. 회사 휴머노이드가 마지막으로 그의 에이전트 몸이었다면, 그 몸에서 배운 손놀림은 회사 자산일까 개인 경력일까. 이력서에는 근무 연수 대신 어떤 몸에서 어떤 사고를 피했는지가 적힐 수 있다. 가방을 검사하는 산업도 생길 것이다. 누가 기억을 넣었는지, 어느 모델이 규칙을 고쳤는지, 어떤 몸에서 실패했는지 확인한다. 전자서명은 내용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만 말한다. 그 기억이 진실인지, 그 습관이 새 몸에서도 안전한지는 별도 문제다. 오래 쓴 가방에는 지혜와 편견, 복구법과 낡은 공포가 함께 쌓인다. 몇 년 뒤 모델 선택 화면은 출입국 기록처럼 보일지 모른다. 이 가방은 Claude에서 문서 검토 31회를 마쳤고 Codex에서 배포 실패 두 번을 복구했다. 휴머노이드 세 종류를 거치며 컵을 놓친 적이 한 번 있고, 아이가 있는 공간에서는 팔 힘을 8퍼센트로 제한한다. 출처를 설명할 수 없는 기억 세 개는 격리 중이다. 그때 나는 새 모델의 점수보다 먼저 몸의 사양을 볼 것이다. 이 손은 무엇을 들 수 있는가. 이 눈은 무엇을 저장하는가. 이 몸에서 생긴 잘못을 다음 몸까지 가져가야 하는가. 성능 좋은 두뇌와 몸은 계속 바뀐다. 끝까지 내 것이어야 하는 것은 집도 몸도 아닐 수 있다. 이 가방의 열쇠를 누가 쥐는가.

맥락 세탁소 2031년 서울시장 선거 이틀 전 밤 11시 17분, 커피 기계가 평소와 같은 소리를 내며 빈 종이컵을 내놓았다. 나는 박리안 후보의 홍보 영상을 다시 틀었다. 2019년 해온물류창고 화재 현장이 나왔다. 영상에
맥락 세탁소 2031년 서울시장 선거 이틀 전 밤 11시 17분, 커피 기계가 평소와 같은 소리를 내며 빈 종이컵을 내놓았다. 나는 박리안 후보의 홍보 영상을 다시 틀었다. 2019년 해온물류창고 화재 현장이 나왔다. 영상에서 박리안은 누구보다 빨리 달려와 대피를 지휘하고 부상자에게 담요를 씌웠다. 자막은 ‘끝까지 현장을 지킨 사람.’ 영상이 끝나자 검은 화면에 내 얼굴이 잠깐 비쳤다. 편집장은 마지막 토론의 첫 질문을 정하라고 했다. 나는 12년 전 대피가 8분 늦어진 이유를 확인하겠다고 했다. “자정까지 확인해. 확인되면 첫 질문으로 올리고 1면에 걸어. 아니면 빼.” 나는 출처 목록을 넘기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인터넷에 남은 것 중 뭐가 진짜인지 알아야 뭘 쓰지.” 편집장이 대꾸했다. “기계는 말끔한 문장만 내놔. 잘린 조각을 다시 붙이는 건 아직 기자 몫이야.” 지난 3달간 모은 자료를 펼쳤다. 정보공개로 받은 조사위 문서를 취재 에이전트 NEX-9에게 읽게 했다. 답은 짧았다. ‘화재 당시 통신이 11분간 끊김.’ 검색과 뉴스, 휴대전화 비서와 자동차 라디오까지 같은 말을 했다. 출처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링크는 처음 자리로 돌아왔다. 뿌리는 하나였지만 화면에서는 여섯 개의 증거로 갈라져 있었다. 기사에는 기자 이름이 붙어 있었다. 초안은 뉴스 에이전트가 썼을 가능성이 컸다. 사람이 제목만 고치고 승인하는 기사는 드물지 않았다. 처리 기록은 모두 ‘정상’이었다. 속기 에이전트는 보고서를 줄이며 원문으로 가는 길을 지웠다. 뉴스 에이전트는 남은 요약을 한 줄로 잘랐다. 검색 에이전트는 같은 문장이 많을수록 사실에 가깝다고 계산했다. 선거 에이전트는 마지막 문장을 ‘검증된 경력’으로 올렸다. 열두 해 동안 에이전트들은 앞선 답을 원문처럼 읽었다. 정보공개로 받은 조사위 문서의 수정 전 내용을 열자 삭제된 문장이 나왔다. ‘지휘실 공식 녹음이 11분간 끊김.’ 속기 에이전트가 ‘공식 녹음’을 빼자 뉴스 에이전트는 ‘통신 두절’이라 썼다. 검색 에이전트는 같은 말을 옮긴 기사들을 따로 확인한 증거로 셌다. 소방과 경비 무전은 이어졌고 지휘실 녹음만 비어 있었다. 그 11분 사이 M17 임시 카드가 지휘실 문을 열었다. 등록자 이름은 가려져 있었다. 3시 6분, 소방 무전은 연기가 번진다고 경고했다. 3시 8분, 대피는 보류됐다. 3시 12분, 구호차가 북쪽 비상문 앞을 막았다. 통로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큼 좁아졌다. 대피는 3시 16분에야 시작됐다. 일부는 연기 속으로 돌아갔다가 쓰러졌다. 구호차 번호를 검색하자 ‘운전자의 현장 판단’이라는 기사만 되풀이됐다. 인용 주소도 다시 같은 기사들로 돌아왔다. 북문을 막은 구호차 번호로 경비업체에 운행기록을 직접 청구했다. 회신 원본에는 ‘현장지원 책임자의 지시로 차량 이동’이라고 적혀 있었다. 공개본 처리 에이전트가 ‘현장지원 책임자의 지시로’를 지운 듯했다. 이후 남은 문장이 ‘운전자의 현장 판단’으로 분류돼 여러 기사에 복사된 흔적이 이어졌다. 녹음에는 한마디만 남았다. “구호차 북문 앞으로 옮겨.” 지휘실 전화에 녹음된 말이었다. 그러나 앞뒤가 잘렸고 목소리도 흐렸다. 이 기록과 잘린 녹음만으로 박리안의 명령이라고 쓸 수는 없었다. 책임자를 좁히려고 정보공개 회신에 딸려 온 행사 일정표를 대조했다. ‘부시장 발표 뒤 박리안 대피 지휘 및 구호품 전달 촬영.’ 카메라는 북문을 향했다. 박리안이 촬영 계획을 알았다는 단서일 뿐이었다. 캠프에 물었다. 박리안은 물자와 기관 연락만 맡았고 대피 결정은 소방 책임자의 몫이었다며 당시 인터뷰 파일을 보냈다. “현장 판단을 존중했고, 보고만 받았습니다.” 공개 영상은 여기서 끝났다. 자막 에이전트는 첫 문장만 가져갔다. 캠프가 보낸 원본에는 한 문장이 더 있었다. “다만 현장지원에 필요한 인력과 차량 배치는 제가 지시했습니다.” 차량을 움직일 권한은 ‘다만’ 뒤에 있었다. 명령까지 입증된 것은 아니었다. 이름을 가린 에이전트와 문장을 자른 에이전트는 서로를 몰랐다. 문장이 다음 답으로 넘어갈 때마다 박리안의 이름은 더 옅어졌다. 수정 전 보고서의 이관번호로 보관 장부를 대조해 기록 보관소 44호 열람을 신청했다. 그곳에는 M17 카드 대장과 지휘실 백업 녹음이 봉인돼 있었다. 유족도 공개에 동의했다. 11시 39분, 직원이 봉인을 풀었다. 오래 붙어 있던 테이프가 마른 종이처럼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자정 뒤에는 자료가 옮겨져 3주 동안 볼 수 없었다. 21분 남았다. NEX-9에 봉인 번호를 넣었다. 검색 결과는 없었다. 인터넷은 잘린 기록은 수백 번 되돌려 줬지만, 잘리기 전 기록은 한 줄도 내놓지 못했다. 11시 53분, 휴대전화에 편집장의 이름이 떴다. “20초만 보내. 그래야 네 이름으로 단독 내고 1면도 지켜. 전체를 풀면 둘 다 날아가.” 직원이 재생 중이던 녹음을 이어 틀었다. 첫 보고에서는 불이 작고 스프링클러가 작동 중이라고 했다. 곧 소방 담당자의 다급한 보고가 이어졌다. 연기가 예상보다 빨리 번지고 있으니 지금 대피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불은 곧 꺼져. 지금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면 대피 순서가 엉켜. 발표 끝날 때까지 기다려. 그다음 북문 대피는 내가 맡을게. 구호차 북문 앞으로 옮겨. 카메라 선 안쪽으로 붙여.” 소방 담당자가 다시 반대했지만, 같은 목소리가 또 기다리라고 했다. 대피는 8분 늦어졌다. 구호차는 카메라 선에 세워졌다가 북문을 막았다. 직원이 M17 카드 대장을 열었다. 가려졌던 등록자 칸에 박리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인터뷰 원본과 녹음 속 목소리도 같았다. 11시 57분. 흩어져 있던 기록이 한 사람을 가리켰다. 송고창에 ‘20초 단독’과 ‘원본 전체 공개’가 떴다. 20초짜리에는 카메라와 구호차만 있었다. 거기에는 첫 보고도, 대피 경고도, 박리안이 이를 무시한 과정도 없었다. ‘20초 단독’ 아래에는 벌써 내 이름이 붙어 있었다. 커서는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린 것처럼 그 옆에서 깜박였다. 원본을 공용망에 올리면 모든 언론사가 본다. 단독은 사라진다. 손을 마우스에서 뗐다가 다시 올렸다. 1분 43초가 남았다. 나는 원본 전체 공개를 눌렀다. 첫 질문에는 이렇게 썼다. “‘보고만 받았다’는 말씀 뒤에 붙은 ‘다만’부터 설명해 주십시오.” 11시 59분, 유족 동의서와 녹음 전체가 올라갔다. 내 이름과 1면 표시는 사라졌다. NEX-9의 답은 바뀌었다. 다른 에이전트들은 새 원본을 ‘많은 자료와 내용이 다른 미확인 문서’로 밀어냈다. 되풀이된 요약 수백 건이 원본 하나를 눌렀다. 토론 시작음과 함께 NEX-9가 미리 등록해 둔 박리안의 상대 후보 검증 항목을 띄웠다. ‘철거민 전원 합의 이주.’ 기사와 검색 답변마다 같은 문장이 떴다. 이 문장의 원본도 석 달을 쫓았다. 시청 공개 목록에는 회의 제목만 남고 첨부 파일은 삭제돼 있었다. 정보공개 청구는 개인정보를 이유로 기각됐다. 폐쇄된 대책위 사무실의 건물 관리인을 찾아가 취재 목적과 내 연락처를 남겼다. 닷새 뒤 마지막 총무에게 전화가 왔다. 세 번 더 통화한 뒤 그가 외장 저장장치를 들고 나왔다. 참석자 이름을 가리고 당시 배포본과 대조한 뒤에야 회의록 사본을 건넸다. 그 문서에는 뒷문장이 있었다. ‘철거민 전원 합의 이주. 다만 철거 당일까지 연락이 닿지 않은 가구는 합의 대상에서 제외함.’ 연락이 닿지 않은 가구를 분모에서 지우자, 남은 사람은 ‘전원’이 되었다. 토론 보조 에이전트가 첫 문장만 떼자 다른 에이전트들이 받아썼다. 복사될 때마다 새 출처의 주소가 붙었다. NEX-9의 출처는 1개에서 17개, 다시 204개로 불어났다. 하나를 열자 기사는 검색 답변을, 검색 답변은 다시 처음 기사들을 가리켰다. 화면을 맨 아래까지 내렸다. 어느 답에도 ‘다만’은 없었다. 빈칸도 없었다.

우리는 같은 미래를 업데이트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텔레그램 창을 열어 에이전트에게 개발을 시킨다. 어차피 코드는 보지 않게 된지 오래됐고, 사무실이나 집 밖 어디서나 가장 간편하고 반응속도 높게 개발할때 아직 이보다 효율적인
우리는 같은 미래를 업데이트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텔레그램 창을 열어 에이전트에게 개발을 시킨다. 어차피 코드는 보지 않게 된지 오래됐고, 사무실이나 집 밖 어디서나 가장 간편하고 반응속도 높게 개발할때 아직 이보다 효율적인 셋업은 찾지 못했다. 내가 무엇을 만들려는지, 지금 결과에서 무엇이 마음에 걸리는지, 어디까지 확인돼야 끝난 것인지를 입력하는 루프만 반복하면 된다. 공공장소가 아니면 손가락 타이핑도 거의 하지 않는다. 마이크 버튼을 누르고 생각을 목소리 그대로 쏟아낼 뿐이다. “아니… 방금 그건 취소하고 이쪽으로.” 혼잣말처럼 번복한 흔적까지. 말로 입력하는 쪽이 타이핑보다 3배 이상 빠르기도 하지만, 말끔하게 정돈된 문장보다 정리되기 전의 의식을 들려줄 때 에이전트가 내 생각의 흐름을 더 잘 따라오는 장점도 있다. 나는 Hermes Agent와 함께 개발한다. 반복되는 일이 자동으로 스킬로 형성되는 구조 덕분에, 지난달에는 여러 문장으로 설명해야 했던 일을 오늘은 한 문장으로 시킬 수 있다. 이 구조적 장점 덕분에 OpenClaw를 누르고 에이전트 사용량 1위에 올랐을 것이다. 작년 말까지 Claude Code나 Codex를 터미널에 바로 띄워 개발하던 때와 지금의 에이전틱 개발이 가장 크게 달라진 지점은 모델의 지능이 아니다. 모델 위에 내 업무 기억과 개발 습관, 도구와 그 사용법, 완료 기준, 실패했을 때의 복구법이 미리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한 번의 실행 안에서 어떤 모델과 도구를 부를지, 어떤 전문 에이전트에게 일을 넘길지, 어떤 맥락을 함께 건넬지, 어디서 멈춰 내게 확인받을지를 조정한다. 업계에서 오케스트레이션이라 부르는 실행 제어다. 모델이 두뇌라면 이 층은 오늘 어떤 기억을 안고 깨어날지, 무엇을 경계하고 어디서 멈출지를 정한다. 더 좋은 모델은 나올 때마다 갈아 끼울 수 있다. 반면 함께 일하며 생긴 방식은 그렇게 쉽게 교체되지 않는다. 개인화의 무게중심은 모델이 아니라 모델 바깥에 쌓인다. 그래서 내가 에이전트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새 기능을 만들어 달라는 말이 아니다. “방금 실수한 부분을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게 구조적으로 고쳐.” 그러면 에이전트는 틀린 답 하나만 고치지 않는다. 기억이 부족했는지, 규칙이 모호했는지, 완료 조건이 허술했는지 되짚는다. 메모리와 스킬을 손보고 회귀 테스트를 붙인다. 어느 순간부터 내 에이전트는 자신의 운영 규칙과 복구 로직을, 때로는 Hermes의 핵심 코드까지 직접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올해 봄 OpenClaw를 쓰다 Hermes로 건너왔을 때, 제온과 시온, 미온, 사노, 라온으로 부르는 내 다섯 에이전트를 각자의 텔레그램 봇에 연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의 게이트웨이가 여러 프로필을 나눠 맡도록, 봇마다 서로 다른 성격과 메모리와 세션을 불러오도록 코드를 직접 고쳤다. 잘못된 계정이 들어오면 다른 봇으로 넘기지 않고 응답 자체를 막았다. 기억이 한 번 섞이면 개인화의 전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Hermes의 공식 구현은 6월 18일에 공개되어 다음 날 릴리스에 포함됐다. 지금은 공식판에서도 옵션을 켜면 한 게이트웨이가 여러 프로필의 봇을 함께 관리한다. 결국 같은 방향으로 만났지만, 그사이 내게 필요했던 기능은 내 코드가 메웠다. 여러 프론티어 모델을 동시에 부르는 도구도 바꿨다. 한 모델이 늦었다고 전체가 멎지 않도록 호출마다 제한시간을 두고, 먼저 도착한 답은 버리지 않고 남겼다. 일이 남았는데 끝났다고 착각하는 문제에는 미완료 항목이 있으면 완료를 선언하지 못하는 장치를 붙였다. 긴 작업이 중간에 끊길 때는 판단 이유와 중간 결과를 반드시 남기게 했다. 같은 실패를 겪을 때마다 기억만 늘어난 게 아니라, 다음 실패를 다루는 코드가 달라졌다. 이런 수정을 수없이 거듭한 지금, 내가 쓰는 Hermes는 순정 Hermes와 상당히 멀어졌다. 같은 씨앗에서 출발했지만 내 잔소리와 시행착오를 먹고 자란 다른 계통이다. 직접 만든 에이전트 메모리 시스템 MemKraft도 무엇을 결정했는지만 저장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 결과는 어땠는지, 그 정보를 언제까지 믿어도 되는지를 함께 남긴다. 내가 리뷰하는 것도 코드 자체보다 변경의 이유에 가깝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소프트웨어 개인화라는 단어의 정의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의 개인화는 완성된 소프트웨어 안에서 아이콘 배치나 배경색, 단축키 따위를 고르는 일이었다. 에이전트와 함께 지내면 경험이 기억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 기억이 규칙을 바꾸고, 검증할 테스트와 새 도구를 만들고, 복구 로직과 코드베이스 자체를 갈아엎는다. 설정에는 취향이 남지만 코드에는 한 사람이 실패하고 회복한 방식이 남는다. 그래서 오케스트레이션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오케스트레이션은 주어진 실행 안에서 순서와 분기를 조정하는 일이고, 내가 보고 있는 건 그 실행을 감싸는 기억과 규칙과 코드가 경험을 거치며 다음 버전으로 넘어가는 단계다. 나는 이 갈라짐을 개인별 에이전트 계보(Agent Lineage)라고 부르고 싶다. 같은 기반에서 출발한 에이전트가 한 사람의 선택과 실패를 검증되고 되돌릴 수 있는 형태로 번역해 자기만의 계보로 갈라지는 것이다. 그러면 모두가 같은 형태의 에이전트를 쓴다는 전제도 어긋난다. 업데이트는 완성된 새 버전을 통째로 덮어쓰는 일이 아니라, 플랫폼이 고친 공통 기능과 내가 키운 변경을 서로 합치는 일이 된다. 같은 Hermes 2.0을 받아도 누구의 에이전트는 결제 전에 세 번 확인하고, 누구의 것은 일을 더 잘게 나누며, 누구의 것은 모호한 부탁을 받으면 먼저 되묻는다. 화면만 다른 게 아니라 작동 원리의 일부가 다르다. 에이전트 플랫폼의 역할도 전혀 달라진다. 완성품을 배포하는 대신 계보를 키우는 곳이 된다. 공통 기반의 보안 업데이트는 받아들이되 나를 닮아 바뀐 규칙은 지켜야 하고, 개인의 코드와 공식판이 충돌하면 병합해야 하며, 잘못 배운 변화만 골라 되돌리면서 기억은 남겨야 한다. 경쟁력은 기능의 개수보다 수백만 갈래로 갈라진 계보의 상속과 병합, 검증과 롤백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능력에서 나올 것이다. 개발에서 먼저 겪은 이 구조는 일상 생활로 번질 것이다. 일정과 관계, 이동과 구매, 건강과 일은 지금 서로 다른 앱에 흩어져 있다. 개인 에이전트는 그 사이를 따라다니며 한 사람의 맥락을 이어 붙인다. 지난 여행에서 싫어했던 동선과 긴 회의 다음 날에는 약속을 잡지 않는 습관이 같은 기억 안에서 만난다. 기억이 쌓이면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이 반복되면 그 사람에게만 맞는 규칙과 코드가 생긴다. 같은 에이전트를 받은 두 사람도 몇 달 뒤면 같은 요청에 전혀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다. “이번 주말에 내가 좋아할 만한 숙소를 골라줘.” 한 사람의 에이전트는 전망도 없는 구도심의 작은 호텔을 잡는다. 그가 여행에서 오래 기억한 것이 새벽 골목의 빵집과 낡은 서점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에이전트는 식당 하나 없는 외딴 바닷가 숙소를 고른다. 지난 여행에서 계획을 전부 취소하고 파도 소리만 듣던 오후를 가장 좋아했다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같은 문장 뒤에 서로 다른 생의 기록이 붙자 정답도 갈라진다. 역설적으로 소프트웨어가 사람마다 갈라질수록 공통 기반은 더 중요해진다. 여러 서비스를 오가며 실제로 행동하려면 신원과 권한, 결제와 기록, 감사와 되돌리기의 문법은 같아야 한다. 개인의 코드는 달라져도 서로 만나는 접합부는 단단해야 한다. 지금의 SaaS도 사라지기보다는 화면 뒤로 물러나, 에이전트가 기대는 공식 기록과 책임의 기반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느 모델을 쓰느냐가 아닐 것이다. 나와 함께 변한 규칙과 코드, 실패를 통과하며 만들어진 계보는 누구의 것인가. 플랫폼을 옮길 때 그 전부를 데려갈 수 있는가. 좋은 플랫폼은 가장 똑똑한 에이전트 하나를 파는 곳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르게 자란 계보가 끝까지 그 사람에게 속하도록 만드는 곳일 것이다. 마이크 버튼을 누른다. “아니, 그건 취소하고.” 무심코 덧붙인 망설임 하나가 기억이 되고, 규칙이 되고, 에이전트의 뼈대가 되는 코드 한 줄을 바꿔 놓고 있다.

우버 블랙을 불렀는데 중국차가 왔다 포르쉐 911 터보 S보다 출력이 두 배 센 차를 1억 원 안팎에 살 수 있다면, 어느 나라 차일까. BYD의 프리미엄 브랜드 덴자가 만든 Z다. 1,582마력. 시속 100km까지 1.9
우버 블랙을 불렀는데 중국차가 왔다 포르쉐 911 터보 S보다 출력이 두 배 센 차를 1억 원 안팎에 살 수 있다면, 어느 나라 차일까. BYD의 프리미엄 브랜드 덴자가 만든 Z다. 1,582마력. 시속 100km까지 1.96초. 최고속도는 시속 350km다. 충전에는 9분이 걸린다. 정말 놀라운 것은 가격. 중국 현지 예상 가격은 40만~50만 위안, 우리 돈으로 약 8천만~1억 원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중국차와 포르쉐를 한 문장에 넣으면 농담처럼 들렸지만, 어느새 둘은 같은 표에 올려놓고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덴자는 911부터 겨눴다. 아래에서 천천히 올라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 선전에서 본 풍경이 떠올랐다. 백화점 1층에 전기차 매장이 줄지어 있었다. 명품 가방과 화장품이 있을 자리에 NIO, XPeng, Li Auto의 차가 서 있었다. 밥을 먹고 걷다가 차 문을 열어보고 운전석 화면을 만졌다. 그들은 자동차를 사려면 대리점까지 찾아가야 한다는 오랜 습관을 없애버렸다. 주말마다 가족이 밥을 먹고 영화를 보는 곳의 입구에 자동차를 가져다 놓았다. 살 생각이 없던 사람도 앉아보고, 화면을 넘겨보고, 옆 매장의 차와 비교했다. 초기 스마트폰도 그랬다. 사람들은 통신 기술을 공부해서 아이폰을 산 게 아니었다. 매장에서 손으로 만져본 뒤 다음 휴대전화의 기준이 바뀌었다. 중국 전기차도 비슷한 길을 가는 듯했다. 설명보다 먼저 손에 닿고, 익숙해진 뒤 지갑을 노린다. 중국 차 안에 넣는 기능이 낯설었다. 화웨이와 세레스가 만든 AITO M9에는 뒷좌석용 프로젝터와 32인치 전동 투사막이 들어간다. 화면을 붙여놓은 게 아니다. 천장에서 막이 내려오고 좌석과 조명, 선셰이드가 영화관처럼 바뀐다. 냉장과 온장이 모두 되는 냉장고도 있다. 샤오펑 X9은 3열을 바닥 아래로 전동 수납한다. 일부 모델은 2열 좌석을 돌려 서로 마주 보게 한다. 양왕 U8은 네 바퀴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 제자리에서 회전한다. 침수됐을 때는 일정 시간 물에 떠서 천천히 탈출할 수도 있다. BYD는 차 지붕에서 드론이 이륙해 차량을 촬영하고 돌아와 충전하는 장치까지 상품으로 내놨다. 대형 화면과 냉장고 자체는 독일과 일본 고급차에도 있다. 중국차가 놀라운 이유는 그 기능들을 다루는 태도다. 가죽과 목재를 더 좋은 것으로 바꾸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차 안을 영화관과 거실, 침실로 바꾸고 차 밖에는 드론까지 붙인다. 고급차를 잘 만든 자동차보다 무엇이든 해보는 공간으로 보고 있었다. 현대차와 기아도 전기차를 잘 만든다. 충전과 전비에서 강하고 세계 곳곳에 공장과 정비망도 있다. 다만 현대차가 먼저 내세웠던 800V 충전은 중국 신차에서도 빠르게 흔해지고 있다. 오늘의 자랑거리가 내년에는 기본 사양이 되는 시장이다. 여기에 중국 AI가 붙기 시작했다. DeepSeek와 Qwen 같은 오픈웨이트 모델은 자동차 회사가 직접 가져와 줄이고 고칠 수 있다. 차량 설명서를 익히게 하고, 중국어 음성 명령과 정비 기록에 맞춰 다시 훈련할 수도 있다. 남의 API가 열리기를 기다릴 이유가 줄어든다. BYD와 지리 같은 업체들은 이미 DeepSeek를 차량 시스템에 연결하겠다고 나섰다. 먼저 바뀌는 곳은 운전석 화면과 음성비서다. 중국의 몇몇 양산차에서는 음성 명령 하나로 좌석을 눕히고 창문을 닫고 조명과 공조, 영상을 함께 바꾸는 기능도 쓴다. AI가 말을 잘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차 안의 물건을 움직인다. 중국차에는 AI가 움직일 수 있는 물건이 유난히 많다. 프로젝터와 냉장고, 회전 좌석, 전동 도어가 이미 소프트웨어에 연결돼 있다. 오픈웨이트 모델은 사용자의 말을 이런 장치의 동작으로 번역한다. 차가 많이 팔릴수록 어떤 명령을 못 알아들었는지 배우고, 다음 업데이트에서 다시 고칠 기회도 많아진다. 비슷한 기분을 아부다비에서 자주 느낀다. 나는 거의 매달 UAE에 가는데, 언제부턴가 일반 우버를 부르면 렉서스나 BMW가 오고, 우버 블랙을 부르면 중국산 전기차가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몇 번 반복되니 묘했다. 언제부터 중국차가 우버 블랙에 오는 차가 됐을까. 운송회사는 자동차 잡지처럼 차를 평가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굴렸을 때 얼마가 남는지 본다. 차값, 전기료, 보증 기간, 수리하는 동안 서 있는 시간을 계산한다. 승객이 문을 열었을 때 실내가 충분히 넓은지도 본다. 그 계산에서 중국 전기차가 선택되고 있었다. 덴자 D9 같은 차가 딱 그렇다. 토요타 알파드가 오래 지켜온 의전용 미니밴 자리에 훨씬 낮은 가격과 화려한 2열 좌석으로 들어간다. 중국차를 사겠다고 결심한 적 없는 사람도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동안 한 시간쯤 타게 된다. 판매원이 붙지 않는 시승이다. 거부할 이유도, 긴장할 이유도 없다. 이렇게 확장중인 중국 자동차의 생태계적 브랜딩은 어느새 빈 틈이 없어지고 있다. 슈퍼카 덴자 Z가 1,582마력으로 사람을 돌아보게 만든다. D9은 말없이 공항에 기다리고 있다. 한쪽은 포르쉐와 비교되며 이름을 알리고, 다른 쪽은 승객의 몸으로 그 이름을 기억하게 한다. 자동차 브랜드는 오랫동안 광고와 모터쇼, 레이싱으로 만들어졌다. 이제는 호출 앱과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도 차를 기억하게 만든다. 내가 차를 고르지 않아도 알고리즘이 먼저 태워준다. 뒷좌석 화면이 내 말을 알아듣고 필요한 것을 찾아주면 낯선 엠블럼은 금방 덜 낯설어진다. 그다음 장면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호텔 앞에는 덴자와 지커가 줄을 선다. 쇼핑몰에서는 샤오미 자동차의 새 AI 기능을 만져본다. 집에서는 같은 회사의 휴대전화와 가전이 차에 이어진다. 아이는 큰 화면과 말이 통하는 차를 기억하고, 부모는 조용했던 공항 이동을 기억한다. 몇 년 뒤 차를 살 때 어느 나라 차인지보다 지난번에 얼마나 편했는지를 먼저 떠올릴 수 있다. 이런 속도로 진화하는 중국 전기차 생태계에 한국 자동차 메이커들이 경쟁할 수 있을지 문득 걱정될 때가 많다. 다음에 아부다비에서 우버 블랙을 부르면 어떤 중국차가 올까. 나는 차 문을 열기 전에 엠블럼부터 확인할 것이다. 벌써 그들의 방식대로 새 브랜드를 배우고 있는 셈이다.

기억은 언제 행동이 되는가: MemKraft v3까지 업데이트 노트 LongMemEval 98.0%를 알린 뒤로 토끼굴에 공지를 못 했다. MemKraft를 내 개인 에이전트에 붙여 매일 쓰면서 문제를 하나씩 고치다 보니 어
기억은 언제 행동이 되는가: MemKraft v3까지 업데이트 노트 LongMemEval 98.0%를 알린 뒤로 토끼굴에 공지를 못 했다. MemKraft를 내 개인 에이전트에 붙여 매일 쓰면서 문제를 하나씩 고치다 보니 어느새 v3가 되어 있었다. 많이 기억하고 잘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기억이 늘어날수록 더 어려운 질문들이 나타났다. v1.0.2에서는 먼저 성능을 재현할 수 있게 했다. LongMemEval의 데이터 준비, 검색, 답변, 채점을 다시 돌릴 수 있는 평가 도구를 패키지에 넣었다. 검색도 정확한 표현, 의미 확장, 시간 단서, 통합 순위로 나눴다. v1.0.3에서는 긴 회의록을 겹치는 조각으로 저장했다. 필요한 한 문장이 수천 자 안에 묻히지 않게 하고, 정확한 검색이 실패할 때만 느슨한 검색을 쓰게 했다. 곧 저장량 자체가 문제가 됐다. 내 MEMORY.md가 153KB까지 커진 적이 있다. v1.1.0은 기억을 가져오고, 오래된 항목을 보관층으로 옮기고, 정해진 크기로 요약하고, 전체 상태를 진단하게 했다. v1.1.1은 파일 변경을 감시하고 정리 작업을 예약했다. 중요한 점은 오래된 기억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많이 기억하는 기반을 유지하면서, 지금 자주 필요한 것과 오래 보관할 것을 나눴다. v2.0에서 문제의 모양이 바뀌었다. 메모를 각각 찾는 것만으로는 관계를 설명할 수 없었다. A가 B와 일하고 B가 C를 맡는다는 사실을 모두 저장해도, 셋을 연결한 질문에는 자주 틀렸다. 그래서 로컬 SQLite 지식 그래프를 붙였다. 사람, 조직, 프로젝트를 선으로 잇고 여러 단계를 따라가게 했다. v2.1은 한국어 조사와 어순에서도 이 관계를 뽑도록 고쳤다. v2.2는 담당자가 CEO에서 CTO로 바뀌면 예전 역할의 유효 기간을 닫았고, 질문 유형에 따라 정확 검색, 관계 확장, 시간 순서를 여러 번 훑었다. v2.3은 여기서 더 나아갔다. BM25로 문서 길이와 희귀 단어를 반영하고, RRF로 서로 단위가 다른 검색 순위를 안전하게 합쳤다. 원인과 결과의 사슬, 중복 기억과 만료된 사실을 정리하는 consolidation, 시간 질문과 개수 질문을 위한 별도 경로도 이 시기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를 배웠다. 잘 찾는 시스템은 틀린 것도 잘 찾는다. 담당자가 바뀌었는데 석 달 전 메모가 검색 1위로 올라오면, 못 찾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관계와 시간은 검색을 꾸미는 부가기능이 아니었다. 어떤 사실이 누구와 연결되고 언제까지 참이었는지 알아야 현재의 답이 된다. v2.6에서는 기억을 일화, 일반 지식, 절차로 구분하고, 활동량과 중요도에 따라 보관 등급을 추천했다. 같은 대상에 서로 다른 값이 동시에 유효하면 충돌로 표시했다. 기억이 많아진 뒤에는 저장 여부보다 어떤 종류의 기억인지, 서로 양립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실패도 있었다. v2.7.3에서 문장을 숫자 벡터로 바꾸는 로컬 embedding 검색을 실험했다. 표현이 달라도 의미가 비슷한 문장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검증에서는 검색 시간이 약 13배 늘었고 유의미한 정확도 향상은 없었다. v2.7.4에서 기본 경로에서 빼고 선택 기능으로 돌렸다. 그 뒤 v2.8과 v2.9는 더 화려한 검색법보다 기존 검색을 제대로 빠르게 만드는 데 집중했다. 문서를 매번 다시 읽지 않도록 인덱스와 읽기 캐시를 만들고, 역색인으로 관련 후보만 훑었다. 빠르다는 이유로 기억을 누락하지 않도록 기존 결과와 동일한지도 함께 검사했다. v2.7.1에서 들어간 ReasoningBank는 또 다른 문제에서 시작했다. 에이전트가 지난달 실패한 방식으로 같은 작업을 다시 시도했다. 결과만 저장하고 그 결과에 이른 과정은 버렸기 때문이다. ReasoningBank는 생각, 행동, 결과, 교훈을 하나의 궤적으로 남겼다. v2.9.2에서는 이를 한 번의 호출로 기록하고 유사한 과거 작업을 찾게 했다. v2.10과 v2.11에서는 작업 시작 전에 관련 실패와 성공을 짧은 분량으로 불러오되, 그 내용을 신뢰할 수 없는 인용문으로 취급했다. 기억 속 문장이 다음 에이전트에 명령을 내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v2.12부터 v3의 기반 공사가 시작됐다. Memory Gym은 관계, 시간, 충돌, 희귀 단서가 섞인 시험으로 검색 변경을 평가하고, 기준을 넘지 못하면 릴리스를 막는다. provenance는 기억이 어느 문서와 구간에서 나왔는지 기록하고 why()로 근거를 되짚게 했다. v2.13의 candidate는 검토 전 정보를 곧바로 사실로 승격하지 않고 임시 보관한다. session overlay는 같은 대화에서는 방금 들은 내용을 바로 쓰되 다른 대화와 장기 기억에는 새지 않게 한다. resolver dry-run은 저장하기 전에 중복, 수정, 충돌 여부를 미리 보여준다. v3.0은 이 조각들을 기억의 생애주기로 묶었다. 정보가 들어오고, 검증되고, 현재 사실이 되고, 낡고, 정리되고, 다시 쓰이는 전 과정이다. v3.0.1은 현재 사실의 갱신 상태와 후보 기억의 폐기를 감사할 수 있게 했고, 숫자의 합계나 기간도 근거가 분명할 때만 계산하게 했다. v3.0.2는 제한된 컨텍스트 안에서도 본문보다 날짜가 먼저 잘려 시간 계산이 틀리는 문제를 고쳤다. 날짜, 시간, 숫자의 표기 차이도 실제 오답과 채점 방식의 오차를 구분해 측정하게 했다. v3.0.3에서는 ReasoningBank의 자연어 힌트가 모델 호출을 안정적으로 줄이는지 28개 과제와 9개 자료로 총 1,260회 실험했다. 결과는 gate FAIL이었다. 자연어 교훈은 다시 해석해야 했고, 정확도와 지연이 안정적이지 않았다. 여기서 기억과 실행 사이에는 권한 경계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만든 deterministic execution은 기억 속 문장을 실행하는 기능이 아니다. 출처와 파일 무결성을 확인하고, 미리 허용한 여섯 개의 정확한 절차 문법과 일치할 때만 로컬에서 처리한다. 임의 코드와 셸 명령은 실행하지 않는다. 모호하면 닫힌 상태로 실패하고 기존 모델 경로를 정확히 한 번만 호출한다. 고정된 28개 사례에서 24개를 로컬로 처리하고 4개만 모델로 넘겼다. 정확도는 28/28을 유지했고 호출은 28회에서 4회로 85.714% 줄었다. 실제 provider 순차 실험에서는 305.406초가 12.894초가 됐지만, 긴 지연이 포함된 단 한 번의 관측이므로 일반적인 성능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전체 검증은 2,240 passed, 3 skipped였고 독립 리뷰의 Critical과 Important 지적은 0건이었다. 기존 Markdown, schema v1, 공개 API도 그대로 호환된다. 에이전트의 기억이 다음 행동의 근거가 되는 순간, 기억 시스템은 권한 시스템이기도 하다. 많이 기억하는 능력 위에 연결과 시간, 출처와 검증, 실패 학습과 안전한 실행이 차례로 쌓여야 한다.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은 많이 기억하고, 정확히 연결하고, 근거를 설명하며, 기억한 것을 다음 행동에 제대로 쓰는 에이전트다. MemKraft는 MIT 라이선스로 공개되어 있다. 스타, 포크, PR 모두 환영한다. https://github.com/seojoonkim/memkraft

법정화폐의 평균 수명은 27년일까 어느 날 아침, 지갑 앱이 나보다 먼저 일어나 있다. 밤새 냉장고는 부족한 우유를 주문하고, 작업용 AI는 서버 사용료를 결제하고, 자동차는 충전비를 낸다. 내가 눈을 뜨기 전에 열세 건의
법정화폐의 평균 수명은 27년일까 어느 날 아침, 지갑 앱이 나보다 먼저 일어나 있다. 밤새 냉장고는 부족한 우유를 주문하고, 작업용 AI는 서버 사용료를 결제하고, 자동차는 충전비를 낸다. 내가 눈을 뜨기 전에 열세 건의 거래가 끝난다. 월급 통장에서는 원화가 빠져나갔지만 우유 가게에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들어가고, 서버 회사는 이름도 모르는 기계용 결제 단위로 돈을 받는다. 내게 보이는 것은 초록색 체크 표시뿐이다. 결제 완료. 설정을 열어본다. 지갑은 밤사이 업데이트됐다. 맨 아래에 작은 글씨가 있다. ‘더 빠르고 저렴한 결제를 위해 최적의 통화를 자동으로 선택합니다.’ 잔액의 통화 표시는 여전히 원화다. 월급도 원화로 들어왔고 아파트 대출도 원화로 남아 있다. 세금 고지서에도 ₩가 선명하다. 그런데 지갑의 거래 기록을 내려보니 원화는 출발점에만 있다. 국경을 넘는 순간 달러로 바뀌고, 기계끼리 정산할 때는 화면 뒤로 사라진다. 원화는 죽지 않았다. 다만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 장면을 상상하게 된 건 인터넷에서 본 이미지 한 장 때문이다. 법정화폐의 평균 수명은 27년이라고 했다. 역사상 775개 가운데 599개가 사라졌고 중앙값은 15년이라는 설명도 붙어 있었다. 숫자가 구체적이었다. 어딘가에 원본이 있을 것 같아서 찾아봤는데, 출발점은 IMF나 세계은행이 아니었다. Mike Hewitt가 2008년 DollarDaze라는 사이트에 올린 「Fate of Paper Money」였다. 사이트는 사라지고 글만 Internet Archive에 남아 있다. 화폐의 부고를 모으던 사이트가 화폐보다 먼저 문을 닫은 셈이다. 원문을 열어보니 이미지와 숫자가 달랐다. 표를 직접 계산해도 평균은 약 38.5년, 중앙값은 17년이었다. 짤에 적힌 27년과 15년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표의 내용이 거짓은 아니다. 식민지의 돈, 군대가 발행한 돈, 화폐개혁 전후의 돈이 한데 섞여 있다. 물가 폭등으로 버려진 돈과 유로로 바뀐 독일 마르크도 똑같이 사망 처리됐다. 마르크는 죽었다기보다 이름을 바꾸고 큰 집으로 이사한 쪽에 가깝다. 살아 있는 돈은 계산에서 빠졌다. 원화와 달러에는 아직 마지막 날짜가 없었다. 끝난 통화만 모아 평균을 내면 오래 버티는 돈은 명단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 표는 화폐의 수명표라기보다 전쟁과 독립, 국가 해체와 통합이 지나간 흔적을 정리한 것이다. 그래서 27이라는 숫자가 믿을 만한 “법정 화폐의 평균 수명”은 아니지만, 덕분에 내가 쓰는 원화도 언젠가 만들어진 제도이고 무한히 유지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됐다. 지금의 원화는 1962년 화폐개혁부터 세면 올해 예순네 살이다. 그렇다면 원화의 마지막 날은 언제일까. 화폐는 어느 날 심장이 멎듯 죽지 않는다. 맡고 있던 일을 하나씩 빼앗기며 죽어갈 것이다. 원화는 한국 안에서만 강하다. 월급과 세금, 아파트 대출, 회사 장부와 정부 예산이 모두 원화로 묶여 있다. 오천만 명의 생활과 계약이 같은 단위를 쓴다. 세계인이 원화를 모으지 않아도 이 연결망이 원화를 살려둔다. 작은 나라의 돈도 이런 연결망 안에서는 오래 버틸 수 있다. 국력만으로 화폐의 수명을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문제는 국경만 넘으면 다른 세계가 열린다는 점이다. 2024년 한국 수출대금의 84.5%, 수입대금의 80.3%가 달러로 결제됐다. 원화 비중은 약 3%와 6%였다. 한국 기업이 만든 물건을 팔아도 청구서는 달러로 적힌다. 원화는 집 안의 언어이고 달러는 항구의 언어다. 세계의 국경을 다시 높아지면 원화의 집은 잠시 더 튼튼해질 수도 있다. 관세와 보조금, 자국 중심의 공급망은 국내 통화의 역할을 붙드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런데 벽이 높아질수록 사람은 문이 아니라 틈을 찾는다. 송금이 느리고 비싸지면 달러 가치에 맞춰 움직이는 스테이블코인이 휴대전화 속 우회로가 될 수 있다. 국가는 달러를 막으려 벽을 세웠는데 달러는 몸집을 줄여 지갑 앱으로 들어온다. 어느새 사람들의 지갑에 작은 외환시장이 열린다. 월급은 원화, 저축은 달러, 해외 서비스 비용은 스테이블코인. 주소는 서울이지만 세 개의 화폐권에서 산다. 처음에는 결제 통화만 달라진다. 다음에는 가격표가 달라진다. 그 뒤에는 머릿속 계산기가 바뀐다. 월급은 원화로 받아도 내 시간값을 달러로 계산하고, 집값과 투자수익을 달러로 비교한다. 화폐가 밀려나는 순간은 지폐를 버리는 날이 아니다. 내 미래의 값을 다른 돈으로 먼저 떠올리는 날이다. AI와 함께 변화는 조용해지면서 빨라진다. 지금까지 작은 나라의 돈을 지켜준 건 법만이 아니다. 사람은 익숙한 단위로 가격을 보고, 환전이 귀찮아서 월급 받은 돈을 그대로 쓴다. 이 사소한 관성이 자국 통화의 방파제다. 하지만 사용자가 허용한 범위 안에서 결제하는 AI에는 애국심도 고향도 습관도 없다. 수수료와 환율, 처리 시간을 비교해 가장 유리한 경로를 고른다. 거래가 적은 통화는 바꾸는 데 돈이 더 들고 받아주는 곳도 적다. 그래서 AI가 덜 고르고, 덜 고르니 거래가 더 줄고, 거래가 줄어 다시 더 비싸지는 고리가 생길 수 있다. 작은 나라의 돈은 사람이 직접 지갑을 열던 시대보다 훨씬 빨리 결제 화면 뒤로 밀려날 수 있다. 사람은 원화로 물건을 샀다고 생각하지만 판매자는 달러로 받을 수 있다. 몇 번의 환전이 있었는지는 영수증 아래 작은 글씨로 밀려난다. 기계가 서버와 데이터, 전력과 광고를 서로 사고파는 시장에서는 지폐의 익숙한 얼굴도 중요하지 않다. 언제든 호출되고 잘게 나뉘며 자동으로 정산되는 돈이면 된다. 사람이 월급을 세는 단위와 기계가 즐겨 쓰는 단위가 갈라질 수도 있다. 그때 화폐 경쟁은 중앙은행의 건물 밖으로 나온다. 어느 돈이 API에 먼저 연결되는지, 지갑 첫 화면에 놓이는지, 결제 버튼의 기본값이 되는지가 중요해진다. 국가는 세금을 원화로 걷을 수 있다. 하지만 국경 밖의 모든 기계가 원화를 먼저 찾게 만들 수는 없다. 원화는 세금 고지서와 급여명세서에 오래 남을 것이다. 그런데 저축과 국제 거래가 떠나고 기계마저 원화를 호출하지 않는다면, 원화는 살아 있으면서 작아진다. 달력으로는 장수하지만 할 일이 줄어든 화폐다. 그래서 다가올 화폐의 부고에는 사망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가격표가 먼저 떠나고, 저축이 그 뒤를 따르고, 마지막에는 기계가 그 돈의 이름을 잊는다. 아무도 장례식을 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지갑 앱이 조용히 업데이트될 것이다. 기본 결제 통화가 변경되었습니다.

제일 똑똑한 모델 하나로는 부족했다 나는 큰 개발 작업을 Codex에 곧바로 맡기곤 했다. 요구사항을 주면 여러 파일을 빠르게 고쳤고, 실행과 검사까지 마친 뒤 결과를 설명했다. 그런데 가장 곤란한 실패는 코드가 틀린 경우가 아니었다. 기능은 제대로 작동했지만, 내가 원한 제품이 아니었다. Codex는 내가 준 목표를 빠르고 충실하게 완성했다. 문제는 그 목표가 맞는지 따져보는 단계가 부족했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Claude로 먼저 계획을 만들고, Codex에 구현을 맡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역할이 명확해 보였다. Claude는 계획하고, Codex는 구현한다. 최근 Claude의 Fable 5와 Codex의 GPT-5.6 Sol을 함께 쓰면서는 이 차이가 더욱 선명해졌다. 두 모델 모두 이전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됐지만, 역설적으로 내가 각자에게 맡기고 싶은 역할은 더 뚜렷해졌다. 물론 현실은 그렇게 깔끔하게 나뉘지 않았다. Claude가 세운 계획은 코드 앞에서 자주 깨졌다. Codex가 파일을 읽고 실행하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면 계획부터 다시 써야 했다. 계획과 구현은 앞뒤로 분리된 두 단계가 아니라 서로를 계속 수정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이 차이를 “Claude는 창의적이고 Codex는 꼼꼼하다”는 성격론으로 설명하기는 쉽다. 하지만 둘 다 계획과 구현, 테스트와 검토를 수행할 수 있다. 사용자가 경험하는 성능은 모델 하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시스템 지침, 파일을 찾는 방식, 사용할 수 있는 도구와 권한, 오류가 돌아오는 속도, 작업을 멈추는 조건 같은 환경이 행동을 함께 만든다. 비공개 학습 방식을 추측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작업 환경과 피드백 구조를 살펴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내가 Claude를 특히 유용하게 느끼는 순간은 목표가 아직 흐릴 때다. 예를 들어 “처음 온 사용자에게 직관적인 가입 화면”에는 정답이 하나가 아니다. 설명을 먼저 보여줄 수도 있고, 바로 체험하게 할 수도 있다. 사용자를 구분하는 질문부터 던질 수도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첫 답을 빠르게 확정하는 능력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능성을 펼쳐놓는 능력이다. 다만 Claude가 채운 빈칸은 내 의도가 아니라 모델의 추정이다. 결과가 그럴듯하다고 해서 요구를 제대로 이해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 Claude의 첫 답은 완성된 계획이 아니라 비교하고 검증하고 버릴 수 있는 가설로 다뤄야 한다. Codex가 힘을 발휘하는 구간에는 틀렸다고 말해주는 존재가 많다. 파일이 없으면 탐색 결과가 알려준다. 코드가 틀리면 컴파일이나 실행 과정에서 오류가 난다. 기존 기능을 깨뜨리면 자동 검사나 실제 화면에서 드러난다. 모델의 설명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현실이 아니라고 반박해주는 피드백이 촘촘하다. 그래서 구현은 계획을 받아 적는 일이 아니다. 계획 속 가설을 실제 코드에 대입해보는 실험이다. Codex는 파일을 읽고, 조금 고치고, 실행하고, 실패 원인을 추적한다. 이 반복을 통해 선택지를 줄이고 잘못된 가정을 제거한다. 계획의 오류는 기능을 상당 부분 만든 뒤에야 드러날 수 있지만, 구현 단계의 오류 중 상당수는 더 빨리 돌아온다. 내 작업 방식 안에서 비유하자면 Claude는 0에서 1에, Codex는 1에서 100에 강하다. 최신 모델인 Fable 5와 GPT-5.6 Sol을 사용하면서 이 대비가 더욱 선명해졌다. Claude는 가능한 1을 여러 개 만들고, Codex는 선택된 1을 현실에 부딪혀 100으로 가져간다. 이것은 두 모델의 보편적인 능력에 대한 평가라기보다 내가 둘을 배치하는 방식에 가깝다. 그런데 이 도식에는 중요한 단계가 하나 빠져 있다. 0과 1 사이의 사람이다. Claude가 세 가지 방향을 제시해도 어느 것이 실제 1인지는 자동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해결하려는 문제, 포기할 수 없는 기능, 허용 가능한 변경 범위와 실패 비용을 사람이 보고 골라야 한다. 이 판단 없이 Claude의 답을 Codex에 넘기면 틀린 가설이 높은 완성도로 구현된다. 그래서 큰 작업을 시작할 때는 Claude에 리서치를 맡기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역으로 인터뷰하게 한다. 확인된 사실과 모델의 추정을 분리하고, 하나의 정답 대신 몇 가지 접근을 비교하게 한다. 내가 방향을 고르면 변경 범위, 유지할 동작, 완료 조건과 중단 조건을 붙여 Codex에 넘긴다. 예상하지 못한 파일이나 의존성을 만나거나 변경 범위가 커지면 멈추도록 지시한다. 중단은 실패가 아니다. 계획이 현실과 충돌했다는 새로운 증거다. 관련 파일과 실패한 명령, 틀린 것으로 드러난 가정을 돌려받고 그 증거로 Claude의 계획을 고친다. 자동 검사를 통과해도 끝은 아니다. 검사 항목에 포함되지 않은 기능은 사라져도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다. 그래서 작업 과정을 보지 않은 다른 모델이나 검토자에게 최초 요구사항과 실제 변경 사항을 다시 비교하게 한다. 가능하다면 실제 화면과 사용자 행동까지 확인한다. 다른 모델도 비슷한 맹점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수정에 이 절차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되돌리기 쉽고 범위가 명확한 작은 작업은 Codex에 바로 맡기는 편이 낫다. 탐색과 선택을 앞에 두어야 하는 것은 요구가 모호하거나 여러 기능이 얽혀 있고, 잘못 갔을 때 되돌리는 비용이 큰 작업이다. 이 조합은 두 회사가 합의해서 만든 협업 방식이 아니다. 경쟁하는 두 제품의 장점을 사용자가 손으로 이어 붙인 상태다. 양쪽 모두 조사, 계획, 구현, 검토를 자기 제품 안으로 흡수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의 역할 차이가 계속 유지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다음 경쟁은 모델 하나의 점수보다 작업 루프의 설계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최근에는 이런 접근을 ‘루프 엔지니어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직 하나의 정의가 정착된 것은 아니다. 반복적인 프롬프트를 시스템으로 대체하는 자동화를 강조하기도 하고, 에이전트의 실행과 검증, 개발자와 사용자의 피드백까지 함께 다루기도 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사람을 다시 루프에 넣자”는 말이 아니다. 사람의 판단을 예외적인 승인 절차가 아니라 루프의 핵심 구성 요소로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표를 세우고, 가설을 만들고, 실행 결과를 관찰하고, 다음 행동과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전체 반복 안에 사람의 맥락과 판단이 들어가야 한다. 이 관점에서 Claude와 사람, Codex는 하나의 피드백 루프를 이룬다. Claude는 가설의 범위를 넓힌다. 사람은 목적과 위험을 보고 다음에 검증할 가설을 고른다. Codex는 실제 코드와 실행 결과로 그 선택을 검증하거나 반박한다. 그 과정에서 얻은 증거는 다시 Claude의 계획을 바꾼다. 좋은 루프는 많이 반복하는 루프가 아니다. 빠른 실행, 믿을 만한 피드백, 판단 근거의 기록, 명확한 중단 조건이 함께 있어야 한다. 자동 검사가 엉뚱한 목표를 측정하고 있다면 빠른 Codex는 오답을 더 빨리 최적화한다. 틀린 가정이 기록에 남으면 Claude는 같은 계획을 반복한다. 속도가 높아질수록 목표와 평가 기준을 더 자주 의심해야 한다. 기억도 필요하다. 어떤 접근을 버렸는지, 어디에서 현실과 충돌했는지, 왜 계획을 바꿨는지를 다음 작업이 물려받아야 한다. 관측한 사실과 당시의 추정도 분리해야 한다. 오래된 정보와 잘못된 요약은 기억이 아니라 다음 실패의 원인이 된다. 마지막에는 루프 바깥의 평가가 있어야 한다. 계획을 만든 모델과 코드를 고친 모델이 같은 기준만 바라보면 맹점도 반복된다. 작업 과정을 모르는 검토자, 실제 사용자의 반응, 제품 지표와 운영 환경이 필요한 이유다. 내부 루프가 빨라도 외부 현실과 연결되지 않으면 틀린 방향으로 정교해질 뿐이다. 루프 엔지니어링은 AI를 더 오래 돌리는 기술이 아니다. 추측을 검증 가능한 가설로 바꾸고, 실패에서 얻은 증거를 다음 판단까지 돌려보내는 기술이다. 잘 설계된 루프는 틀린 가정을 빠르게 제거한다. 잘못 설계된 루프는 틀린 목표를 더 빠르게 증폭한다. 앞으로 개발 에이전트의 격차는 첫 답의 영리함보다 여기에서 벌어질 것이다. 계획이 틀렸을 때 시스템은 알아차릴 수 있는가. 그 사실이 다음 판단까지 돌아갈 수 있는가. 똑똑한 모델 하나로는 부족했다. Claude와 Codex를 이어 붙여도 마찬가지였다. 부족했던 것은 지능이 아니라 루프였다.

< 게임과 AI 에이전트 그리고 온체인 경제 - 다음 10년의 신뢰 아키텍처 > 게이머로서 NDC(Nexon Developer Conference)는 오랜 시간 동경하던 행사였다. 그 무대에 연사로 초대받아 '게임
< 게임과 AI 에이전트 그리고 온체인 경제 - 다음 10년의 신뢰 아키텍처 > 게이머로서 NDC(Nexon Developer Conference)는 오랜 시간 동경하던 행사였다. 그 무대에 연사로 초대받아 '게임과 AI 에이전트 그리고 온체인 경제'를 주제로 이야기했다. 행사장을 돌아보며 넥슨은 정말 게임을 사랑하는 회사라고 느꼈다. 발표의 핵심은 세 단어였다. 게임. 에이전트. 신뢰. https://ndc.nexon.com/session?day=3&session=101 게임은 비인간 경제 주체를 가장 먼저 만난 산업이다. 봇이 그랬다. 자동 사냥, 작업장, 골드 파밍. 봇은 사람처럼 접속해 반복 행동을 하고 보상을 가져가고 시세에 영향을 미쳤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고 책임도 지지 않았다. 번호판 없는 자동차가 도로를 달리는 것과 같았다. 문제는 자동화가 아니라 신원과 책임이 없는 자동화였다. 그래서 AI 시대에는 탐지하고 차단하는 방식으로는 부족하다. 에이전트에게 신원을 부여하고 권한과 책임을 관리해야 한다. 공항을 떠올리면 쉽다. 여권이 있고 비자가 있고 보안 검색이 있다. 에이전트도 식별하고 권한을 검증하고 정산할 수 있어야 한다. LLM과 에이전트는 다르다. 챗GPT나 클로드는 답을 잘하는 똑똑한 검색창이다. 에이전트는 기억과 권한과 도구를 갖고 실제 행동까지 수행한다. 피드백 루프를 돌며 스스로 개선하고 일을 끝까지 마친다. 챗GPT를 잘 쓰는 것만으로 AI를 잘 쓴다고 믿으면 착각이다. 개인 에이전트를 만들어 자동화 루프를 경험하지 않으면 AI 잠재력의 1%도 쓰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역할도 직접 플레이하는 사람에서 목표를 제시하고 검증하는 감독자로 바뀐다. 게임의 재미도 바뀐다. 직접 조작에서 여러 에이전트를 운영하고 전략을 설계하는 방향으로. 포켓몬 레드 해커톤에서 100명 넘는 지원자 중 선발된 참가자들이 에이전트가 게임을 플레이하도록 설계하고, 실패하면 고치는 과정을 반복했다. 모두가 입을 모았다. 직접 하는 것보다 AI에게 훈수 두는 게 더 재미있다고. 내가 못하면 스트레스를 받지만 에이전트가 실패하면 수정해주고 더 똑똑하게 만들 수 있다. AI 파티 구성, AI 군단 운영 같은 새로운 플레이가 열린다. 기피되던 힐러나 서포터를 AI가 대신할 수도 있다. 캐릭터와 아이템을 거래하던 시대에서 에이전트 자체를 사고팔고 대여하고 그 성격과 전략에 투자하는 시장으로 확장될 수도 있다. MMORPG는 이미 현실 경제였다. 화폐, 경매장, 공급과 소멸, 인플레이션, 거래, 투자, 길드. 플레이어는 노동자이자 상인이자 투자자였다. 게임 회사들은 이 경제를 수십 년 운영해왔다. 앞으로 에이전트는 자동 사냥을 넘어 거래 시점을 판단하고 자산을 운용하고 다른 에이전트를 고용하는 경제 주체가 될 것이다. 여기서 블록체인이 들어온다. 에이전트가 서로 거래하고 협업하려면 증명이 필요하다. 누구의 에이전트인지, 무엇을 했는지, 과거 신뢰도는 어떤지. 에이전트에게도 여권과 평판과 감사 로그가 필요하다. 블록체인은 그 신원과 거래 기록과 신뢰를 관리하는 장부가 된다. MCP, A2A, 스테이블코인 결제, ERC-8004. 이 표준들이 AI 경제의 기반이 될 것이다. 머지않아 게임이라는 장르의 본질도, 게이머의 경험도 에이전트와 함께 크게 달라질 것이다. 내년 말이면 선진국에서는 1인 1에이전트 시대가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 그때 사람들은 묻게 될 것이다. 왜 내 AI 에이전트는 이 게임에 접속할 수 없느냐고. 게임 산업이 AI 에이전트 사회의 헌법을 가장 먼저 설계하고 검증하게 될 것이다. 많은 변화와 새로운 기회가 열린다. 그 청사진의 일부를 나눌 수 있도록 초대해준 넥슨에 감사하다.